[강규형 칼럼] ‘쇼팽 콩쿠르 우승자 에릭 루’ KBS교향악단 협연…한국 첫 무대 성황


[강규형(명지대 교수·전 KBS교향악단 운영위원·서울시향 이사) 칼럼 @이코노미톡뉴스] 쇼팽 콩쿠르 우승자와 KBS교향악단의 협연을 보고, 중국계 미국인 에릭 루(Eric Lu)는 사실 신인이 아니다. 그는 저저번 쇼팽 콩쿠르, 즉 조성진이 우승할 때 4위를 했었고, 그 이후에 메이저 음반과 레코딩을 하고 연주활동을 꾸준히 하는 등 이미 기성 연주자이다. 하지만 무서운 집념으로 쇼팽 콩쿠르에 우승하기 위해서 ‘중고 신인’으로 재수를 택했다.


사실 쇼팽 콩쿠르는 이렇게 재수 삼수하는 사람들에게는 박한 대우를 하지만 올해는 그의 집념을 인정해서인지 우승을 선사했다.


중국계 미국인 에릭 루(Eric Lu)가 청중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중국계 미국인 에릭 루(Eric Lu)가 청중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올해 쇼팽 콩쿠르은 특히 기교적으로 빼어난 참가자들이 많았었는데 그가 우승을 한 것은 참가자 중에서도 특히 기교적으로 실수가 거의 없었던 것에 점수를 주지 않았나라는 추측이 든다. 활발한 연주 활동을 하면서도 칼을 갈고 이번 쇼팽 콩쿠르에 임한 것임을 알 수가 있었다.


지휘는 팔순이 넘은 노장 레너드 슬래트킨(Slatkin). 여러 오케스트라의 상임을 맡았었는데, 특히 세인트루이스 심포니와의 시절이 그의 가장 활발했고 행복했던 시간이었던 듯하다. 좋은 레코딩들도 이때 많이 나왔다.


첫 곡 신디 맥티의 “순환”은 한국 초연이고 다른 현대곡들과는 달리 경쾌하고 신나는 곡이라 무리 없이 들을 수 있었다. 큰 의미는 없고 심플한 곡이다. 모르는 작곡가인데, 슬래트킨의 현 부인이라고 프로그램 북에 나와 있다. 맥티 여사가 직접 무대 위에 올라와서 인사도 했다.


다음은 기다리고 있던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 먼저 작곡됐지만 쇼팽이 더 선호한 다음 곡에 1번을 붙이고, 이곡에 2번을 붙였다. 대개 쇼팽 콩쿠르 우승자들은 협주곡 1번을 택하는데 루는 2번을 택해 우승을 했고, 요번도 한국 청중들에게 2번을 선사했다. 그의 스승이자 브루스 리우(Liu)의 스승인 당 타이 손이 2번으로 아주 오래전인 1980년에 우승했었는데 그 두 경우가 다이다. 즉 2번으로 우승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루는 키가 크고 날씬한 체형. 그는 준비된 연주자였다. 실수가 거의 없이 또박또박 쳐나가는 것을 보면서 콩쿠르에서 유리한 연주자임을 알 수가 있었다. 브루스 리우가 쇼팽 콩쿠르 우승을 하자마자 한국에서 쇼팽 협주곡 1번을 연주했을 때, 그 연주가 리우 우승 당시 연주와도 달랐다. 그리고 빡빡한 일정 때문에 힘이 빠졌는지 다소 의아한 연주를 했던 것과 비교하면은 그는 베테랑답게 침착하고 또박또박하게 연주를 해냈다. 역시 쇼팽 우승자는 살인적인 일정을 수행해야하기 때문에 다소 지친 듯한 표정이기도 했다.


그에게 스타성이 있을 것인가를 보면, 팔이 안으로 굽어서인지 임윤찬과 조성진과 같은 스타 파워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그냥 믿고 들을 만한 연주자라는 점에서 평가해야 할 것 같다.


그의 앙코르가 쇼팽 곡이 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중에 아리아를 들려줬는데 나는 앙코르곡이 더 좋은 느낌을 받았다. 이 연주에서 그는 상당히 몽환적이고 감성적인 접근을 했는데, 그의 독특하고 느림 템포의 접근 방법 더하기 아마도 그가 택한 피아노 파지올리(Fazioli)의 영향도 있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하긴 이 곡은 바흐가 불면증에 시달리는 주(駐)드레스덴 러시아대사인 폰 카이저링크 백작을 위해 작곡한 수면용 음악이었으니…


이번 쇼팽 콩쿠르에서 에릭 루가 친 많은 쇼팽의 독주곡 중에 하나를 더 듣고 싶은 무리한 욕심도 생겼지만, 이날은 이 정도에서 끝났다.


많은 연주자들이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택하고 쇼팽 콩쿠르에서도 대개 그렇지만, 루는 파지올리를 택해 우승했다. 이것도 역시 브루스 리우가 파지올리를 택해 우승을 한 이후 두 번 연속 파지올리의 승리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둘의 공동 스승인 베트남인 스승 당 타이 손의 승리라고 해석할 수도. 여튼 에릭 루는 이날 연주에서도 우승 때 택한 파지올리 피아노로 연주했다. 나는 파지올리와 스타인웨이의 차이를 확실하게 구분해 낼 수준은 못 된다. 파지올리를 처음 들었던 것은 오래전 보리스 베레조프스키가 이 피아노로 연주할 때 처음 들었는데, 스타인웨이에서 나오는 예리한 음보다는 조금 둥그런 느낌이 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지휘자 레너드 슬래트킨(Slatkin). [사진=필자 제공]

지휘자 레너드 슬래트킨(Slatkin). [사진=필자 제공]


인터미션 후에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1번 “1905년”. 에릭 루의 연주가 끝나고 빠져나간 관객들이 꽤 있었다. 쇼스타코비치는 “9번의 저주”를 깬 작곡가였다. 나는 스탈린 시대라고 하는 인류 역사상 가장 혹독한 시대 중 하나를 살아남은 쇼스타코비치의 처절함이 9번의 저주를 깼다는 생각이 든다. “1905”는 그의 일부 다른 난해한 교향곡들과는 달리 1905년 혁명이라고 하는 특정한 주제를 갖고 있는, 즉 스토리텔링이 있는 교향곡이라 훨씬 듣기가 수월하다.


“1905년 혁명”은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이 연달아 일어난 1917년 혁명의 전주곡이긴 했지만 사실상 혁명은 아니었다. 체제가 전복된 것도 아니었고, 광장에 모인 군중들은 차르(Tsar, 황제)에게 청원하기 위해서 모였을 뿐인데, 여기에 대고 느닷없는 총격이 발생하면서 대규모 참사로 이어진 사건이었다. 역사는 이날을 “Bloody Sunday(피의 일요일)”라고 기록하고 있다.


4개 악장이 쉼 없이 약 56분 정도 연주되는 긴 곡인데, 쇼스타코비치는 왜 악장 중간중간에 휴식을 하지 않았는지 좀 의아스럽긴 하다. 4개의 악장이 확연히 구분되는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슬래트킨 자신이 잘 다루는 곡이고, KBS교향악단도 많이 연주한 곡이기도 하고,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해프닝인 2년전 KBS교향악단 연주 중에 팀파니가 찢어진 일도 있었던 곡이다. 지휘자나 KBS교향악단의 연주자이나 이 곡은 익숙한 곡이라 호연이 될 거라는 것은 미리 예측할 수가 있었다. 예상대로 슬래트킨과 오케스트라는 이 곡을 아쉬움 없이 유장하게 잘 연주했다.


종이 울리는 4악장 마지막 부분 파트에서 “나도 안다” 박수가 아닌 “나는 모른다” 박수가 터져 나온 옥의 티가 있었다. 종소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박수가 나오는 행태를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것은 여운을 남기지 않고 나오는 “나도 안다” 박수가 아니라 종소리가 계속 울리고 있는데 터져 나온 “나는 모른다” 박수(음악친구인 서울대 의대 조태준 교수님이 차이콥스키 6번 “비창” 3악장 후에 자주 나오는 박수에 대해 붙인 표현이다. 참 재밌는 표현이라 나도 계속 사용하기로 했다)이기 때문에 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직 종 치지 않았다고요!)


하지만 그 한두 사람 빼고는 모든 사람이 여운을 즐기면서 나중에 열렬히 박수를 쳐줬다. 슬래트킨 옹의 만수무강을 기원한다. 에릭 루의 연주자로서의 미래에도 건승을 기원한다.

실생활에 유용한 정보를 쉽고 정확하게 전하는 생활정보 전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