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s 영화의 위로] 인연과 전생 사이에서…’패스트 라이브즈(2023)’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아내를 처음 만난 건 중학생 때였다. 아내는 이웃집에 살던 초등학교(당시엔 국민학교로 불리었다.) 5학년, 꼬마였다. 달덩이같이 환하고 밝은 사람이었다. 세상의 모든 아빠가 바라는 딸이었고, 모든 학우가 친구 삼고 싶은 소녀였다. 그런 아내가 중학교 진학과 함께 부산으로 이사 갔다. 그 뒤, 몇 통의 편지를 주고받은 뒤, 연락이 끊기고 이어지길 반복하다 필자가 스무 살 무렵, 아예 연락이 끊겼다. 당연히 원인은 무심한 필자에게 있다. 그러다 인터넷이 활성화된 이십 대 후반, 다시 인연이 닿아 평택과 부산을 오고 가며 연애를 한 끝에 지금에 이르렀다.


처음 알게 된 시점부터 계산하면, 우리 사이엔 대략 40년의 세월이 흐른다. 결혼하여 같이 산 시간만 해도 이십 년이 넘었다. 독자 중에는 결혼한 지 삼십 년, 사십 년이 된 분들도 계시리라. 그렇게 오래 살다 보면 이 사람이 내 복인지, 업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복이라고 생각해도, 업이라고 생각해도 그 복과 업의 기원은 결국 나이기에, 종종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아이고, 내 팔자야.”와 같은 말을 한숨에 실어 뱉곤 하는 것일 테다. 그 탄식 후, 잠 못 드는 밤, 옆에 누워 잘만 자는 배우자의 얼굴이 꼴 보기 싫어 팔이라도 꼬집고 싶은 날, 이 영화를 보면서 마음을 좀 가라앉혀 보시라. 요즘 보기 드문 잔잔하고 조용한 영화이니.


소년과 소녀가 헤어진 이후



줄거리는 단출하다. 열두 살, 같은 반 학우인 소년(해성), 소녀(나영)가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러다 소녀가 캐나다로 이민 가게 되고, 연락이 끊긴 후, 12년 후 SNS의 등장과 함께 다시 인연이 이어진다. 둘은 각각 한국의 대학생과 뉴욕에서 활동하는 작가의 삶을 유지하며, 때마침 등장한 화상 통화 앱으로 소통을 이어간다. 그 후, 나영의 말 한마디로 다시 연락이 끊긴 후, 12년 지나 뉴욕에서 재회한다. 그 사이, 나영은 유대계 미국인 작가와 결혼해서 살고 있고 남자는 평범한 직장인이 됐다. 둘은 그런 어른이 되어, 24년 만에, 진짜 얼굴을 마주한다.


이 영화를 보고 싶었던 이유는 우리 부부의 이야기와 닮았기 때문이다. 기회가 안 되고, 미루다 보니 이제야 본 뒤 이 글을 쓰게 됐다. 영화에서처럼 우리 부부는 헤어짐과 만남을 이어갔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 이십 대 후반에 만났을 때, 각자의 곁엔 사람이 없었다.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내도 나도 사귀던 연인과 이런저런 이유로 헤어지고 난 뒤였다. 그렇다고 우리가 재회하자마자 연인이 됐던 건 아니다. 몇 번의 연락이 있었고 마주 봄이 있었다. 그러다 연인이 됐다.


그 뒤로, 그야말로 21세기를 함께 보냈다. 결혼했고 아이도 낳았다. 기쁨도, 슬픔도 함께 겪으며 각각 50대와 40대에 접어들었다. 20대 중반의 아가씨는 이제 40대 중반의 엄마로, 회사에선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며 살고 있다. 50대 초중반에 접어든 필자는 예상치 못한 인생의 궤도로 접어들어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낯선 일을 하고 있다. 그런 탓인지, 이 영화를 다시 생각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영화 스틸컷

영화 스틸컷


재회’의 가치



이 영화는 <비포 선 라이즈> 시리즈의 압축판 같은 영화이나,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이 커플로 맺어지는 영화는 아니다. 전자의 시리즈가 실제로 7년을 터울로 제작되며 두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길 반복하다 결국 부부가 되어, 지지고 볶고 사는 일상을 보여주는 마지막 편으로 마무리된 것과는 달리, <패스트 라이브즈>는 재회, 그 자체로 끝이 난다.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우린 궁금해진다. 뉴욕까지 와서, 24년 만에 만난 두 사람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굳이 왜 그렇게 만나려 했던 걸까? 그 재회의 성과(?)는 도대체 뭘까?


결론적으로, 재회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필자는 부산에 살면서 의정부에 살던 중학교 시절의 친구와 20여 년 만에 만난 적이 있다. 당시 필자는 부산에 정착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변변치 않은 경험과 지식을 끄집어내어 아들과 여행 온 그 친구의 가이드를 했었다. 그러나 그 뒤로 다시 연락하거나 또 만나지는 못했으나 그 기억만큼은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 친구와 아들이 관광객은 잘 모르는 특이한 장소의 벤치에 앉아 남다른 각도에서 광안대교를 보며 기뻐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얼마 전엔 특이한 재회를 경험하기도 했다. 참 안 좋은 버릇인데, 필자는 수영을 하고 나면 이상하게 맥주가 마시고 싶어진다. 다니는 수영장이 대학가에 있는 덕에 주변에 편의점이 많은 관계로 이 유혹을 뿌리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많은 편의점을 지나쳐 가장 다양한 종류의 맥주를 파는 기업형 슈퍼마켓에 들어갔다. 거기서만 파는 특정 맥주가 맘에 들어 그 뒤로도 몇 번 갔다.


그런데 어느 날, 계산해주는 직원이 날 유심히 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그 직원을 안 보는듯하면서 보기를 며칠, 결국 어느 날 계산을 해주던 그 직원이 말을 꺼냈다. “혹시 교수님?”, “아~ 혹시 신…”, “아, 네 저 신00입니다.”, 알고 봤더니 2천 년 대 초반, 대학에서 강사를 할 때 내 수업을 들었던 학생이었다. 졸업 후, 그는 대형 유통업체에 취직했고 현재는 그곳의 점장으로 일하고 있던 것이다. 물론 그 후로, 따로 만나서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그저 가끔 들러 맥주를 사고 결제해주며 눈웃음을 주고받을 뿐이다. 결혼했는지, 아이는 있는지, 묻지도 않았다.


재회의 무게와 의미가 그 뒤의 사건과 서사, 결과로 규정되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 재회는 “다시 만남”, 그 자체의 소중함으로 충분히 의미를 선취한다. 그러니, 재회에 필요한 대사는 “다시 만나 좋았다.”이면 충분하지, “이렇게 어렵게 만났으니 우리 이제부터 인연을 이어가자.”가 될 필요는 없다. 어쩌면 뒤의 대사를 염두에 두고 있으면 재회는 영영 이뤄지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 뒤의 일을 염두에 두고 있기에 재회의 시도 자체를 안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뒤에 이어질 타자의 역사에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줘야만 하는 걸 아닐까, 하는 부담이 있어 그 사람의 무덤덤한 나날에 소중한 기억이 될 수도 있을, 그 기가 막힌 재회의 순간을 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재회의 반가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서사가 그 뒤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일지도 모른다. ‘아,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참 좋았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재회는 충분히 값지다는 생각을 우리에게 남긴 것만으로도 영화의 의미는 충분하다는 것이다.


스틸 컷.

스틸 컷.


‘과거’와의 재회



덧붙이면, 재회의 진짜 성과는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다. 어쩌면 감독이, 나영의 흔들리는 눈빛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시간엔 두께도, 무게도 없다. 순간은 산처럼 무겁지만 지난 세월은 깃털처럼 가볍게 기억에 잠들어 있다. 잠든 세월은 회상의 알람이 울리기 전까진 깨지 않는다. 그렇게 깨기 전까진, 영화 속 나영의 대사처럼 지금, 여기, 이 순간이 인생의 종착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영원히 머물리라 생각한다. 마지막 장면, 나영의 울음은 자신이 달려온 여정과 시간의 무게를 실감했기 때문이라. 또, 나름 충실하게 살아온 여정 속에서 놓쳐버린 소중한 인연들이 해일처럼 덮쳐 왔기 때문이리라. 뭔가가 되기를 바라며 달려왔지만 아무 것도 되지 못한 자신을 향한 연민의 감정이 쏟아졌으리라. 특별한 사람이 되길 원했으나, 평범한 어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아쉬움도 뉴욕의 그 밤처럼 덮쳐 왔으리라. 또 어쩌면, 자기 앞에 미지의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불쑥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그 마지막 울음은 과거의 사람과의 재회를 통해 자신과 재회함으로써 몰려온 감정의 소용돌이가 만들어낸 홍수 같은 것이리라.


연말연시, 과거의 나와의 만남이 지금의 나를 향한 연민으로 이어지게 하지는 말자. 내가 과거로부터 온 나이듯, 지금의 나는 미래의 나를 향해 가고 있다. 해성이 새벽의 레스토랑에서 나영을 떠나는 사람이라 칭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다 떠나는 사람이다. 시간의 유람선을 타고, 비행기를 타고, 우버 택시를 타고 짐을 챙긴 뒤 그렇게 여기서 저기로, 이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떠나는 사람이다. 인연은 그 떠남의 반복 속에서 스치는 것이고 전생(전생이 있다면)은 그 떠나온 곳의 직인이 잔뜩 찍힌 여권 같은 것이다. 인연과의 재회는 그 짧은 여행 중 우연히 만날 수 있는 가장 빛나는 순간이지 않을까? 나의 빛났던 순간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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