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장히 오랜만에 성역에 복귀했다. 시즌1부터 시즌9까지 한 시즌도 빼먹지 않고 항상 플레이했었는데 시즌10은 공교롭게도 도쿄 게임쇼 출장과 일정이 겹치는 바람에 시작 타이밍을 놓쳤고 이후에도 다른 업무로 바빠 손을 댈 수 없었다.
뒤늦게라도 할까 생각했는데 조금 지쳤던 것 같다. 매번 비슷한 테마, 같은 빌드, 이제 어떤 직업을 먼저 키워볼까라는 고민도 더 이상 흥미롭게 다가오지 않았다. 아홉 시즌 내내 달려온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온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12일 더 게임 어워드에서 차기 확장팩 ‘증오의 군주’가 공개됐고, 신규 클래스 ‘성기사’ 얼리 액세스 플레이 소식이 전해졌다. 신규 확장팩 소식도 놀라운데 성기사를 지금 당장 플레이할 수 있다니, 권태기가 싹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디아블로 시리즈 팬이라면 성기사가 얼마나 상징적인 클래스인지 잘 알 것이다. 디아블로2의 팔라딘으로 시작해 디아블로3의 성전사까지, 빛과 정의로 악마를 심판하는 클래스는 시리즈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그만큼 기대와 설렘이 컸던 복귀였다.
명확해진 성장 로드맵
시즌11은 사실 성기사와 축성을 제외하면 큰 테마가 없는 시즌이다. 흡혈귀나 강철 늑대단, 지옥불 군세, 마녀술 등 해당 시즌의 콘셉트뿐만 아니라 시즈널 파워까지 담당했던 테마가 성기사와 축성의 등장으로 ‘신성한 개입’이라는 짧고 굵은 테마로 축소됐다.
사실 테마가 그렇게까지 중요한가라고 물어보면 잘 모르겠다. 어쨌든 매 시즌마다 새롭고 큰 줄기의 테마가 정해지면 유저 입장에서는 새로움을 느낄 수 있으니 나쁠 이유는 없다. 게다가 시즌마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구현된 시즈널 파워가 플레이어의 캐릭터를 한층 강하게 만들어 줬으니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큰 테마가 없으면 이전 시즌과 다를 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고 이는 “콘텐츠가 없네”라는 불만 섞인 목소리가 나오게 된다. 그럼에도 시즌11은 담금질, 명품화 등이 추가되면서 큰 호평을 받았던 시즌4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이유는 간단명료한데, 콘텐츠와 성장 로드맵이 안정화됐기 때문이다. 이제는 막막함 없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하게 알 수 있어 진입 장벽이 크게 낮아졌다.
지금까지 디아블로4는 플레이어를 성역에 내팽개쳐두는 스타일이었다. 게임에 접속하면 “시즌 퀘스트라는 게 있고 퀘스트를 깨고 지옥 물결이나 악몽 던전을 돌면서 알아서 성장하렴”에 가까웠다.
블리자드도 나름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이것저것 시도를 했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신규 유저나 복귀 유저가 뭘 해야 할지 몰라 헤매는 경우가 많았다.
시즌11에서는 명확한 성장 로드맵을 제시한다. 시즌 여정이 시즌 등급으로 개편되면서 시즌 미션을 깨면 각종 재화와 전설 장비를 주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초반 빌드 구성이 가능하다.
더불어 예전에는 릴리트의 제단이나 지역 명망 보너스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던 스킬 포인트와 정복자 포인트를 시즌 등급 보상으로 획득할 수 있게 변경됐다. 덕분에 번거로운 명망 작업 없이 시즌 등급만 진행해도 캐릭터 육성이 가능해졌다.
즉, 시즌 등급만 잘 따라가도 최소 고행 단계까지는 눈감고도 진입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체계적인 가이드가 게임 내에 내장된 셈이다.
각 콘텐츠별 파밍 구조도 명확해졌다. 잊힌 영혼, 옵두사이트, 문양 등 원하는 재화나 성장시키고 싶은 요소가 있다면 해당 콘텐츠를 플레이하면 된다.
디아블로3 이후 오랜만에 성역으로 복귀한 아즈모단과 나머지 고위 악마 두리엘, 안다리엘, 벨리알이 지옥 물결, 악몽 던전, 나락, 지하도시 등 각 콘텐츠의 영향력을 미치면서 조금 더 새로운 긴장감을 선사해 파밍의 재미를 더했다.
담금질과 명품화도 다시 한번 개선됐다. 담금질은 이제 수치만 랜덤이고 원하는 옵션을 확정으로 붙일 수 있다. 명품화 역시 12단계까지 나눠져 있었으나 품질 시스템으로 바뀌고 소모되던 옵두사이트 양도 감소했다.
결과적으로 시즌11은 화려한 테마 없이도 핵심 시스템의 완성도만으로 유저들을 만족시키는 데 성공했다. 성기사라는 강력한 신규 클래스와 개선된 성장 구조가 맞물리며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은 성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드디어 돌아온 근본 클래스 ‘성기사’
12일 더 게임 어워드에서 디아블로4 차기 확장팩 ‘증오의 군주’가 공개됨과 동시에 신규 클래스 ‘성기사’가 오픈됐다. 확장팩을 사전 구매하면 11시즌에서 성기사를 플레이할 수 있다.
시즌11 출시 이후 많은 유저들이 성기사를 육성하고 있으며, 각종 커뮤니티에서는 빌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실제로 접속자 수도 급증했고, 게임 내 활기가 다시 돌아온 분위기다.
먼저 스킬 구성부터 살펴보면 디아블로2의 팔라딘을 즐겨 플레이한 유저라면 향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해머딘, 질딘 등 추억의 스킬들이 디아블로4에 맞게 재해석되어 있다. 기존에는 없었던 신규 스킬도 추가돼 향수와 신선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차이점이라면 디아블로4 클래스마다 존재하는 ‘전문화’다. 성기사의 전문화는 ‘맹세’로 광신도, 거한, 심판관, 사도 중 한 가지를 선택해 능력을 강화할 수 있다. 각 맹세마다 고유한 플레이 스타일을 제공하며, 빌드 방향성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성능면에서도 굉장히 우수하다. 전설 위상, 고유 장비, 정복자 보드 모두 좋은 효과들로만 구성됐다. 대표적인 예시가 전설 위상인데, 위상 효과들을 살펴보면 굉장히 직관적이고 높은 계수로 설정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일명 질딘, 열의 성기사는 열의 스킬과 광신도 전문화와 관련된 전설 위상을 주로 사용한다. 어떤 위상이 있는지 잘 모르는 사람도 위상 효과들을 쭉 살펴보면 “이 위상들을 사용하면 되겠구나”라는 감이 바로 온다. 그만큼 직관적이고 특정 스킬과 연계할 수 있는 위상이 많다.
위상 효과가 뛰어나니까 빌드 다양성도 높다. 중재자 빌드를 필두로 거한 가시, 축방, 축망, 열의 등 많은 빌드들이 준수한 성능을 낸다. 물론 극고점 빌드는 따로 있겠지만, 대부분의 빌드가 고단을 소화할 수 있는 수준이라 선택의 폭이 넓다.
다만 밸런스 문제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모든 유저가 성기사를 육성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밸런스는 중요하다. 현재 성기사는 다른 직업들과 비교했을 때 명백하게 우위에 있다.
앞에서 언급한 성기사의 ‘우수한 성능’에는 공격 능력뿐만 아니라 방어 능력도 포함된다. 무슨 말이냐면 타 직업에 비해 방어 관련 요소를 챙기기가 너무 쉽다.
스킬만 잘 구성해도 받는 피해를 감소시키는 ‘방패 막기’ 확률을 챙길 수 있고, 오라만 ‘딸깍’ 배워주면 방어도와 저항이 무려 40%가 증가한다. 심지어 해당 효과는 지속 효과다. 일일이 눌러줄 필요도 없다.
단순히 단단하기만 하면 문제가 없는데 대미지도 월등하다. 전설 정복자 노드 ‘성채’가 핵심인데, 성채는 주는 피해가 방어도의 1.8%만큼 증가하는 노드다.
해당 효과에는 상한이 없기 때문에 방어도만 주구장창 올리면 고점이 계속 올라가는 구조다. 즉, 방어력을 챙기면 생존력과 화력이 동시에 올라가는 기형적인 구조가 완성된다.
성기사가 예로부터 악마를 때려잡는 정의의 사도라고 하더라도 이는 조절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오만가지 버그로 성역을 평정했던 혼령사와는 다른 의미로 다른 직업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신규 시스템 ‘축성’
시즌11에는 천상의 승천의 힘을 아이템에 주입하여 아이템의 위력을 강화하는 ‘축성’ 시스템이 도입됐다. 새로운 파밍 콘텐츠로 주목받고 있으며, 장비 성능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천사 ‘하드리엘’의 천상의 용광로에서 아이템을 축성하면 추가 전설 능력이 부여되거나 어픽스 1가지가 상급 어픽스로 업그레이드되는 등 랜덤한 효과가 적용된다.
아이템을 축성하면 이후 담금질, 명품화 등 장비 업그레이드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모든 업그레이드를 마친 후 마지막에 축성을 해야 한다. 순서를 잘못 정하면 아이템을 망칠 수 있으니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대략적인 설명만 보면 꽤 악랄한 파밍 시스템처럼 보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결국 모든 업그레이드를 마친 아이템만 축성을 해야 하는데,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미끄러지면 허탈감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파밍을 해보면 오히려 도파민이 도는 파밍 시스템이다. 이유는 축성 효과에 소위 말하는 ‘꽝’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꽝은 자신의 빌드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옵션을 뜻한다.
개편 전 담금질을 생각해보면 조금 더 이해가 빠르다. 이전 시즌까지만 해도 담금질은 랜덤성이 강했다. 무기, 공격 등 담금질 제조법 분류를 선택하고 그 안에서 또 원하는 옵션이 포함된 항목을 선택하는 방식이었다.
해당 항목에 포함된 옵션 중 랜덤으로 한 가지가 붙는 방식이라 자신의 빌드와 전혀 연관이 없는 옵션이 나올 경우 아이템을 완전히 사용하지 못하는 ‘꽝’ 아이템이 탄생했다.
반면, 축성은 이미 담금질, 명품화 등으로 밸류를 높여놓은 상태에서 어픽스를 업그레이드하거나 추가 어픽스 또는 전설 능력이 부여되기 때문에 마이너스가 되는 일은 없다.
물론 많은 유저들이 고점을 위해 도자기 장인의 심정으로 ‘이 도자기가 아니야!’ 하고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겠지만, 적어도 허탈감은 덜하다는 점에서 파밍 동기를 유지하기 좋은 시스템이라 평가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