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세상] 학창시절, 허무하지만 찬란한 ‘빨개져버린’, ‘아직 제목 없음’ 


'아직 제목 없음' (주영현, 네이버웹툰), '빨개져버린' (아하, 아름드리미디어).
‘아직 제목 없음’ (주영현, 네이버웹툰), ‘빨개져버린’ (아하, 아름드리미디어).


두 편의 만화와 웹툰을 만났다. <아직 제목 없음>과 <빨개져버린>이 보여주는 순수함과 절박함 그리고 또 다른 결론의 가능성에 감탄을 한다. 


어릴 때는 좋아서 만화책에 묻혀 살았고, 자라서는 직업이나 이런저런 이유로 만화와 웹툰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어떤 때는 한동안 아예 쳐다보지도 않다가, 또 어떤 때는 하루에도 몇 편씩을 의무로 시작해 재미로 탐독하기도 하다. 그러다 문득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뭔가 이전과는 다른 이질감 같은 게 느껴지는 것이다. 


사실 인간이 느끼는 재미라는 것, 사랑이라는 지독한 감정도 어느 시간 이상 지속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니 아무리 재미있고, 좋아하는 것이라도 계속 보면서 흥분하거나 빠져들기는 어려운 것이다. 게다가 그게 뭔가 이전에 본 것과 같다는 느낌이 들 때면 이미 집중은 깨지고, 내가 무얼 보고 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번에 만난 한 권의 그래픽노블 <빨개져버린>과 한 편의 웹툰 <아직 제목 없음>은 그렇게 나를 환기시켜 준 작품들이다.  


거기에는 학교, 그리고 학창시절이 있다. 


학교는 누구나에게 추억의 장소이자 눈부신 감옥이며 자기 발견의 공간이다. 그래서 어떤 이에게는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는 생각하기도 싫은 기억이기도 하다. 그래도 공통적인 것은 가장 놀랍고도 인상적이며 강렬한 시기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미디어와 콘텐츠는 ‘사랑’만큼 ‘학교’와 ‘청춘’을 그리고, 갈망해 왔다. 


70년대에는 ‘얄개의 전성시대’가 있었고,  80년대는 설까치, 오혜성과 엄지의 극적인 순정이 있었다. 90년대는 <오디션>과 <비트>의 아프도록 아름다운 이야기와 함께 최근까지도 이어진 드라마 <학교>(1999)와 <여고괴담>(1998)이 시작되었다.  


<말죽거리잔혹사>(2004)로 시작한 2000년대는 <외모지상주의>(2014)나 <지금 우리 학교는>(2028~2029/2022 드라마)과 <더 글로리>(2023)로 이어지고 있다. 뭔가 고정된 느낌이 있다. 학교가 폭력과 괴담과 좀비의 동의어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학창시절은 폭력과 불평등의 계급사회이자 잔혹함과 해결되지 않은 상처가 있는 기괴하고도 해석과 해결이 불가능한 시간이자 권위로 남겨진 것일까? 


왜 ‘학교’가 이렇게 되었을까? 


'아직 제목 없음'. [네이버웹툰 갈무리]
‘아직 제목 없음’. [네이버웹툰 갈무리]


누군가에는 웃음이 머금어지는 따뜻한 추억으로, 또 다른 이들에게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잔혹한 기억으로 남은 학창시절이지만 대부분의 청춘들은 그 사이 어딘가를 통과하면서 자라고 성숙했을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라 했던가? 청춘이니까 아픈 것이기도 하다. 자라는 청춘이기에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도저히 답이 없을 것 같은 막막함과 답답함이 머리와 가슴을 온통 지배하던 시기였다. 또한 그렇기에 누구보다 뜨겁게 바라보고, 열심히 덤벼들고, 낄낄거리며 관계를 배우고, 비웃으며 자진을 지키는 법을 배운다. 조숙할 정도로 성숙하지만 또 천진난만하고 의젓하고 따뜻하기도 하다. 


문득 고난과 어둠과 공포로만 그들을 바라보는 데 익숙해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비정상 속에서도 지극히 정상적인 그들의 풋풋하고도 놀라운 개성과 순수함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쿨한 회피와 냉정한 내면의 관찰로 그려낸 교실이데아, <아직 제목 없음> 


<아직 제목 없음>의 시작은 상처 많고 답답한 여고생의 하루에서 시작한다. 그저 그런 이야기와 넘쳐나는 감성으로 익숙한 작품이라는 생각은 일단 몇몇 대사의 영롱함에서 잠시 미뤄둔다. 


'아직 제목 없음'. [네이버웹툰 갈무리]
‘아직 제목 없음’. [네이버웹툰 갈무리]


“처음엔 다시 잠들기 위해 계속 눈 감고 누워 있어도 봤지만, 오라는 잠은 안 오고 생각만 많아져서 더 고통스러웠다.”  


“나만 빼고 다들 행복하다.”  


검색을 한다. ‘지구 멸망’, ‘백두산 폭발’, ‘죽고 싶을 때’  


“다 귀찮다. 대충 버티다보면 알아서 끝이 나겠지.”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던 감정이 툭툭 던지듯 맑은 그림 사이를 채운다. 내 마음 깊은 곳에 보관하고 있는 심리를 해부하듯이 날카롭게 갈라보고, 끄집어내며 알지 못하는 소녀의 감정에 다가가게 된다. 그렇지만 막막하고, 어두울 것 같은 학교에서의 하루는 ‘역시’라는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유쾌한 독백과 해맑은 대사로 채워낸다. 


'아직 제목 없음'. [네이버웹툰 갈무리]
‘아직 제목 없음’. [네이버웹툰 갈무리]


“잠만 잘 거면서 학교는 왜 이렇게 일찍 오는지 참… 독특하다고 해야 하나.” 


“일찍 와서 자고 있으면, 아무도 마주치지 않아도 되니까.” 


왠지 공감이 가는 천희 내면의 독백이 잔잔히 흐르고, 교실에서의 하루도 그렇게 흘러가는 듯하다. 참으로 냉정한 자기분석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여고생을 자신이 관찰하고 있다. 별안간 자신에게 던진 욕 한마디에 절로 웃음이 나오고 응원을 하게 된다. 


“외롭다. 외롭긴 하지만, 대신 자유롭다.” 


“혼자 있는 건 용기다 … 라고 나 자신을 포장해 본다. 사실 그냥 부적응자일 뿐이지만. 


ㅅㅂ 나도 좀 살자.” 


그 관찰과 쿨한 감성은 소녀가 자기만의 히어로와 함께 그곳에서의 생존방식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된다. 


'아직 제목 없음'. [네이버웹툰 갈무리]
‘아직 제목 없음’. [네이버웹툰 갈무리]


“매일 새롭게 외롭고 매일 새롭게 무안하다.”  


“우울한 내 삶의 한 줄기 빛. 이 거지 같은 학교생활을 버티게 해주는 한 남자. 나의 히어로.”  


“보고 있으면 나에게도 아주 조금쯤은 희망이 생긴다. 그래! ‘너 같은 애도 사는데!’ 하고 말이다. 미안, 너한테 미안하지만 나도 좀 살자. 이렇게라도 좀 버틸게.” 


“은밀한 나의 취미. 아니 악취미. 같은 반 구준희 관찰. 덕분에 나는 관심학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너의 그늘에서 편안히.” 


소녀의 세밀한 관찰은 이성에 관한 은밀하고도 아름다운 것과는 조금 다르다. 어쩔 수 없이 헛웃음이 터져 나오고, 킥킥거리는 박수가 절로 쳐진다. 참으로 세밀하고, 가차 없는 관찰 그리고 숨김없는 내면의 독백과 응원 아닌 응원이 이어진다. 


자신의 내면과 주변의 모습이 이토록 날카롭게 지적하다니, 이토록 뻔뻔하고, 해맑게 소화를 해내다니. 아마 그건 교실이라는 공간과 시간이 주는 아이들의 일상이 바로 놀랍고도 스펙터클하기 때문일 것이다. 


“야 걔는 무슨 우리가 맨날 예쁘다 예쁘다 해주니까 아이돌 급인 줄 안다니까. ㅅㅂㅈㄴ 웃기지 않냐?”  


“우리들 사이엔 뭔가 특별한 게 흐른다 믿었다. 제일 좋아하고 많이 의지했고 누구보다 소중했다. 


친구라고 생각했다. 아니 친구였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진.” 


“원래 우정이 그런 건지도. 원래 인간이란 게 그런 건지도.” 


'아직 제목 없음'. [네이버웹툰 갈무리]
‘아직 제목 없음’. [네이버웹툰 갈무리]


교실에서의 하루는 아이들에게는 놀라운 일생을 함축적으로 겪게 만든다. 아직 어리고, 또 어떤 면에서는 성숙했지만, 격정적이고, 조절이 안 되면서도 냉정하고 쿨한 청춘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상처받고, ‘회피’를 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하지만 즐길 수 없다면 미루고, ‘회피’하라! 봤지만 못본 척, 있는 데 없는 척, 심리학에서는 이런 행동을 ‘회피행동’ (Avoidance Behavior)라고 한다. 회피행동은 위협이 되거나 어렵다고 판단하는 상황이나 대상, 생각 등을 피하거나 관여하지 않는 것, 또는 이미 개입한 상황이나 대상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학교, 학교 친구들로부터의 회피, 학교생활에서의 회피, 일상으로부터의 회피, 그리고 더 나아가 관심으로부터의 회피.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이런 회피행동이 더욱 두드러지는데, 나를 힘들고 아프게 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안전함을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나도 좀 살자!”라는 어울리지 않는 듯 던진 천희의 한마디는 그 노력을 보여주고 있기에 우리는 낄낄거리면서도 응원을 하게 된다. 


이런 회피행동은 더 큰 갈등이나 문제를 유발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얼마간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장기간 지속되면 습관화될 수 있고, 자신을 주변으로부터 고립시키고 더 많은 기회와 경험을 차단할 수 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어려움이다. 그렇지만 누가 ‘천희’와 ‘준휘’에게 ‘회피’를 멈추라고 말할 수 있을까? 


구준휘는 ‘운동’ 중에서 달리기를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다른 건 요령이 필요하니까 어려운데, 걍 계속 참으면 되는 거니까, 그냥 참는 건 그나마 좀 쉽잖아. 익숙하기도 하고.” 


어쩌면 천희와 준휘의 행동은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회피 과정에서 발견하게 되는 새로운 경로이자 생존의 코드인지도 모른다. 회피나 순종이거나 아니면 그 사이 어딘가에서 생존의 방법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누구나 가능한 것임을 웹툰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청춘의 힘과 아름다움은 그 막막함 속에서 길을 찾아내는 엉뚱함과 기발함 때문이기 때문이다.  


의욕 없고 결핍을 가진 비주류의 청춘들이 우정과 사랑 속 조금씩 성장해 가는 이야기, <아직 제목 없음>을 박수를 보내는 이유이다. 


 


감옥에서의 내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빨개져버린> 


어느 날 갑자기 눈에 빨간 실핏줄이 터져 안대를 쓰고 학교에 간 주인공 ‘나’에게 이전과 전혀 다른 관심이 쏟아진다. ‘무서운 언니’ 같다는 친한 친구의 말부터 같은 반 친구들의 질문과 선배와 싸워서 이겼다는 소문까지. 평소 존재감 없이 살아가던 주인공은 눈이 나은 후에도 낫지 않았다는 거짓말까지 하며 안대에 집착한다. 


'빨개져버린'. [교보문고 갈무리]
‘빨개져버린’. [교보문고 갈무리]


학창시절 그런 친구가 있었다. 남학교에서 제법 논다는 친구였는데 항상 볼에 사각형 밴드를 붙이고 다녔다. 왜 그러고 다니냐 물어보자, “싸울 때 50점 먹고 들어가!”라는 답이 돌아왔다. 나름 개성 있어 보여서 주변 친구들까지 제각각의 밴드를 제멋대로의 위치에 한동안 붙이고 다니기도 했다. 정말 가관이었던 모습이었지만, 그렇게 우리는 주목받고 싶어 하는 청춘들이었다. 


<빨개져버린>은 그런 아이들의 은밀한 욕망을 조심스럽게 드러낸다. 그건 누구도 아닌 우리의 자녀이자 교실의 구석에 있는 친구의 욕망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욕망이 불순한 것이라 배운다. 그 작은 욕망의 실현, 그를 위한 아이의 노력이 아슬아슬함으로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이는 조마조마하면서도 그 시간을 즐긴다. 바로 내일을 알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이자, 작은 것에 모든 것을 거는 청춘이 거기에 있다. 


'빨개져버린'. [교보문고 갈무리]
‘빨개져버린’. [교보문고 갈무리]


프랑스의 철학자인 푸코는 우리가 기율사회(disciplinary society)에 살고 있다고 보았다. 


“감옥이 공장이나 학교, 병영이나 병원과 흡사하고, 이러한 모든 기관이 감옥과 닮은 것이라 해서 무엇이 놀라운 일이겠는가?” 


우리는 매순간 끊임없이 훈육 받으며 살고 있는 건 비록 항상 인지는 못하지만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더욱 교묘한 훈육의 세례가 퍼부어진다.  푸코는 효과적인 훈육방법으로 ‘위계질서적인 감시’와 ‘규범화한 제재’, 그리고 이 두 가지 기술을 결합시킨 것으로서 ‘시험’을 들고 있다. 


어디가 떠오르는가? 


바로 훈육의 기관이자 사회가 만든 성장의 감옥이 바로 ‘학교’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배운다. 그렇지만 상처와 실수는 누구나에게 있다는 것은 좀처럼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상처와 실수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다는 공포 속에서 살게 된다. 하지만 어쩌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기성세대이자 기존의 질서인지도 모르겠다. 괜히 주입되는 피해의식과 부끄러움에 청춘이 덧없이 괴로워하고, 또 방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빨개져버린'. [교보문고 갈무리]
‘빨개져버린’. [교보문고 갈무리]


<빨개져버린>은 작가의 중학교 때 경험을 바탕으로 한 책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곳에서 나오는 우리의 성장통이 더욱 생생하다. 


또한 작가는 10대의 심리를 ‘빨강’이라는 색을 통해 예리하게 잡아내고 있다. 눈의 실핏줄과 엄마의 신발, 애정을 확인하기 위해서 낸 코피, 잘나가는 선배 언니들의 빨간 입술 등에서 관심 받기 원하는 마음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빨강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다른 색은 최소한으로 사용했다는데, 그런 극단적인 세상은 바로 청소년의 내면에 구축된 세계이며, 훈육의 기관이자 감옥에서 배우게 되는 기율이기도 하다. 


하지만 청춘은 방황하고, 자유롭고, 욕망에 귀가 얇다. 쉴 새 없이 어기고, 혼나고, 바로잡고, 또 일탈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나’ 역시 욕망이 주는 감미로운 관심에 빠지고, 아슬아슬하던 일상의 위태로움은 결국 파국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어떻게 되냐고?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모레도. 


그렇게 작가는 성장통을 겪는 모든 ‘나’들에게 보내는 응원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빨개져버린'. [교보문고 갈무리]
‘빨개져버린’. [교보문고 갈무리]


두 권의 만화, 웹툰은 학원에서 일어나는 스펙터클이 판타지와 폭력만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극단적인 세상이 결코 그렇게 끝나지 않음도 보여주고 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청춘의 놀라운 생명력과 따뜻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 학교와 학창시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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