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숏폼 영상의 순기능을 하나 꼽으라면 그 짧은 영상으로 인해 잊고 있던 풀 버전이 다시 재생된다는 점이다. 이번에 기고한 칼럼의 소재가 된 영화 또한 이런 방식으로 내 마음 속에서 재생 된 영화들이다. 이번 칼럼에선 <보헤미안 랩소디>를 다루려 한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이 영화가 아닌 퀸의 음악에 대하여, 더 엄밀히 말하면 영화를 보며 다시 들으며 마음이 울컥했던 <We are the Champions>라는 곡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한다.
새해의 초입, 지금, 이 노래가 보내는 응원이 절실한 사람이 많지 않을까? 이 노래와 견줄만한 노래가 한국에 <무한궤도>의 <그대에게>를 제외하고 또 있을까? 그렇게 우리는 노래 하나로 위로받았고 1980년대, 영국에서 열렸던 <Live aid> 콘서트에 울려 퍼진 노래는 전 세계를 위로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없는 힘이라도 끌어내어 새해를 살아 내리라 다짐했던 모든 이와 함께 다시 그 음악을 꺼내 듣기 위해 영화를 얘기하는 척하며, 결국엔 이 노래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모두, 이 노래를 다시 들어 보시라 권하기 위해 이 칼럼을 쓰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영화에 대해 굳이 얘기하지 않는 이유는 또 있다. 영화의 내용이 단순하기 때문이고, 그 내용 또한 대체로 음악 팬이라면 다 아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밴드의 멤버들이 만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그 뒤 음악을 창작하는 과정, 앨범을 내고 공연하고 그 와중에 주인공인 프레디 머큐리가 동성애자임을 인정하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알리는 과정이, 불화를 겪은 밴드가 그 전설적인 공연인, 1985년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렸던 라이브 에이드 자선 공연 장면으로 영화는 피날레를 장식한다.
필자는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봤다. 결혼을 한 뒤로는 먼저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결혼 이후 거의 십여 년 만에 먼저 영화를 보러 가자고 제안한 영화가 이 영화였다. 이 칼럼을 쓰면서 그때 당시, 내 감상을 담은 블로그의 글을 다시 읽었다. 라이브 에이드 공연 장면에서 <We are the champion>의 가사를 읽으면서 노래를 들을 때, 필자는 정말로, 상당히 뭉클했던 모양이다.

반전을 거듭하는 남자의 인생
내 마음을 움직였던 그 가사, 다시 찾아, 일부 옮겨본다. 1절은 어두운 과거다. 지면 관계상, 한남자의 고백처럼 바꿔 실어 본다.
“난 나의 의무를 다했어. 형기도 다 살았지. 큰 죄를 지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저 약간의 잘못을 저질렀을 뿐이야. 때문에, 험한 꼴도 많이 당했지(I’ve had my share of sand kicked in my face). 그러나 다 이겨냈어. 지난 일이야.”
이렇게 살아온 남자에게 반전의 2절이 펼쳐진다.
“난 환호에 답해 인사도 했지, 커튼콜도 받아봤고 말이야. 여러분이 내게 명성과 부를, 그리고 그에 따르는 모든 걸 줬어요. 고맙습니다.”
그러나 이 반전 이후에도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말이야. 꽃길만 있는 건 아니더라고(But it’s been no bed of roses). 인생이 어디 유람선 여행 같던가. 인생은 말이야. 모든 사람이 감내해야 할 도전이라고 생각해. 이 도전에서 난 절대 지지 않을 거야(And I ain’t gonna lose).”
이 담담한 인생 고백 뒤에 단호한 승리의 찬가가 이어진다.
“우린 챔피언입니다. 다 승리자란 말입니다. 패자를 위한 시간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린 이 세상의 챔피언이니까요(Cause we are the champions of the world).”
영어 가사를 표시한 부분은 필자에게 인상 깊었던 부분이다. 그리고 사람마다, 유독 의역이 많은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 No time for losers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 노래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저 “패자 따위를 위한 시간은 없어.”라고 해버리면 앞뒤로 이어지는 “우리는 챔피언”이라는 선언이 약간 어색하고 민망해진다. 심지어 매몰차게 느껴진다. 대신 이 가사를 “패자의 시간이란 건 존재하지 않아요.”라고 비틀어 말하면 의미가 좀 달라진다. 인생에 있어서 패자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패자를 위한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렇게 해야 이 노래는 비로소 모두를 위한 승리의 찬가가 된다.

모든 인생을 위한 노래
지금도 이 노래는 승자를 위해 연주될 때가 많다. 축구 대회에서 1등을 한 팀의 주장이 쏟아지는 꽃가루 속에서 커다란 트로피를 들어 올려 흔들 때, 옆에 있던 선수들이 샴페인을 터뜨리고 나이 든 감독은 오랜만에 함박웃음을 지을 때, 그런 장면들이 빠르게 교차 편집되어 전개될 때, 단골 배경 음악이다. 응원단이 팀의 깃발을 흔들며 이 노래를 따라부르는 모습까지 보여준다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그런 장면은 이 노래의 의미를 배신하는 것이다. 웸블리 스타디움에서의 그 공연과 그 공연 장면을 재현한 영화 속 장면이 품고 있는 의미를 담지 못하는 것이다.
영화 속 그 장면을 떠올려 보자. 이 노래에 맞춰 모든 이들이 연대하여 출렁인다. 술집에서도 집에서도 함께 노래한다. 이때, 스타디움과 술집에서 이 공연을 본 사람들이 공교롭게도 다들 승자여서 이 노래에 감동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노래를 부르는 순간만큼은 다들 승자의 기분을 맛볼 수 있기에 그렇게 어깨동무를 한 것도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노래를 오해한 것이다. 애초에 사람의 시간엔 패자의 시간이 없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패자일 수 없다. 모든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은 승자로 기록되는 시간이자 승자를 향해 나아가는 시간이며 결국엔 승자의 역사를 만든 뒤에서야 인생은 끝난다.
살면, 결국엔 승리한다
“패자의 시간”의 위와 같은 해석은 자연스레 <My Way>를 소환한다. 두 노래의 나이가 엄청 차이가 날 것 같아 찾아보니 스무 살도 차이가 안 난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가 1969년, 퀸의 노래가 1977년에 나왔다. 거의 동시대 노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래서일까? 두 노래가 말하는 인생은 묘하게 닮아있다. <My Way>의 3절의 일부다. 1절 2절과 함께 <We are the champions>의 1, 2절과 호응한다. 역시 독백처럼 번역해 봤다.
“내 능력에 버거운 일을 맡을 때면, 종종 날 의심하기도 했죠. 하지만 어떻게든 난 그 일을 해치웠죠. 덕분에 언제나 모든 것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었고 당당히 버틸 수 있었죠.”,
뒤이은 4절은 퀸의 노래 2절과 호응한다.
“무릎 꿇은 사람처럼 말하진 말아야죠. 내 과거를 보면 알겠지만 제법 풍파를 겪었지만, 결국 내 방식대로 살아왔어요.”
두 노래 다 살아남았고 살아가는 사람의 희망찬 노래다. 영화 <타짜>의 대사를 빌려 말하면 두 노래의 주인공 모두 “인생의 파도”가 있었다. 좋은 날도 있었고 나쁜 날도 있었다. 그러나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내일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은 채 살았다. My way를 가진 사람은 Loser가 될 수 없고 Loser가 될 수 없는 사람은……. 그렇다. 별 수 없이 Champion으로 살 수밖에 없다. 이것이 퀸의 노래가, 그리고 My Way가 결국엔 우리 모두의 노래이며 우리 모두를 승리자로 추앙하는 노래인 이유다.
이제 겨우 새해가 갓 한 달이 넘었다. 이런저런 계획들이 어그러지고 빠그러진 이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포기하지 않는 이상 승리는, 결국 예정된 것이다.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선가 복싱 영화 <카운트>의 주연이었던 배우 진선규가 그 영화 속 대사 하나를 낭송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복싱은 다운돼도 끝이 아냐. 카운트 10초 주거든. 힘들면 그 자리에서 그대로 누워 있어. 숨이 돌아오면 다시 일어나는 거야.”, 그렇다. 우린 이제 겨우 한 번 다운 된 거다. 아니 설령 카운트 10이 되어서 졌다고 해도 끝난 게 아니다. 우리에겐 죽을 때까지 게임이 이어지니 말이다. 그 사실이 무섭기도 하지만 그게 인생이다. 포기하지 않는 이상 인생이란 링은 언제까지나 우릴 기다리고 있고, 우리가 그 링에 오르는 이상, 언젠간 우리는 챔피언이 된다. 2월에 접어든 지금, 우리 모두에게 퀸의 노래가 절실히 필요한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