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관계자나 팬을 제외하고, 시상식을 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필자 또한 잘 보지 않는다. 어린 시절, 속칭 기지촌 지역에 살면서 미국의 각종 시상식을 봐온 사람으로서 한국의 시상식은 어쩐지 맘 편히 볼 수가 없었다.
뭐랄까, 맘 편히 보기에는 화면 안의 연예인들의 태도가 너무 경직되어 있다고나 할까. 특히 배우들의 시상식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초대가수의 공연을 보고 있노라면 더 그런 느낌이 든다. 박수에 너무 힘이 들어가 있다. 미소가 너무 인위적이다. 엉덩이를 의자에서 좀 뗄 만도 한데, 누가 본드라도 붙여놨는지 다들 옴짝달싹도 못 한다. 멋진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고 가볍게 어깨를 흔들어 준다면 얼마나 멋지겠는가. 그러나 나의 바람은 꽤 오랫동안 현실이 되지 못했다.
최근에 그 바람이 현실이 됐다. 객석의 배우들은 진심으로 감동했고 즐겼으며 박수를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가수는 무대 아래로 자연스럽게 내려와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배우와 자연스럽게 마주섰다. 둘은 헤어진 후 오랜만에, 그것도 우연히 조우 한 연인 같았다. 가수는 이별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담담히 노래했고 배우는 그 마음을 전해 들으며 남아 있는 사랑의 잔불을 눈빛에 담아 보냈다. 그 와중에, 핸드 헬드 카메라는 이 두 사람을 맴돌며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하모니를 빠짐없이 담아냈다. 지난 가을,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청룡 영화제의 한 순간이다.
두 사람이 불러온 감정들
이후, 박정민과 화사의 퍼포먼스를 반복해서 보다가, 그 음악과 뮤직비디오를 멍하니 듣고 보다가 불쑥 깨달았다. 영상과 노래 가사에 담긴 연인들의 감정은 익히 알고 있으나 앞으론 절대 다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사랑의 난폭함도, 이별의 당혹감도, 이후 몰려올 아픔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살아나가리라 스스로에 하는 다짐도, 사랑도 이별도 지긋지긋하여 이제 다시는 사랑하지 않으리라 맹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사람을 만나면 말릴 새도 없이 솟아나오는 사랑의 감정도 이제는 내 것이 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렇다고 그 감정을 어디 묵혀뒀다가 볼 수도 없다. 젊은 날 있었던 저 감정을 일으켰던 경험들을 추체험(追體驗)하여 같은 감정을 불러 올 수도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랑과 이별과 같은 경험은 저장을 해놨다가 재생 가능한 혼자만의 경험이 아닐뿐더러, 그 감정 또한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강도와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기에 살면 살수록 아는 게 많아지고 경험이 많아진다고 한들, 어떤 감정의 재생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감정은 박제도 될 수 없다. 박제는커녕 길들일 수도 없으며 길들일 수 있기는커녕 생포될 수도 없다. 감정은 늘 그렇게 단어에 앞서 폭발하고 단어는 그 잔해를 겨우 수습하며 뒤를 따른다. 세월이 지나 글로 쓰고 말로 토해내 본들, 그 재현할 수 없는 감정은 회상을 반복 할수록 열화 될 뿐이다. 이렇게 말로도, 글로도 꺼내지 못하는 과거의 감정들을 돌아 볼 때, 그 감정 위를 덮어오는 안개를 닮은 다른 감정이 있다. 사전을 아무리 뒤져봐도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하여, 그저 처음 생각난 단어를 이 감정에 붙이면 아련함이다.
아련하다는 어렴풋하고 희미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단어를 감정이나 추억에 가져오면 그것의 재생 및 회상의 불가능과 그 불가능성을 극복하고 소환하더라도 그 풍경과 정경, 그 감정들이 그때만 같지 않다는 맥락으로도 쓰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맥락에서 사용되는 아련함은 열화 된 이미지를 보는 아쉬움과 손상되지 않은 이미지를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볼 때의 그 감정을 지금은 더는 느낄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의 아쉬움, 그 사이 어딘가에서 슬며시 등장하는 감정일 것이다. 쉽게 말해, 재생 불가능함과 무뎌짐의 그 사이, 층위에서 아련하다는 말이 떠돈다는 것이다. 햇볕과 바람의 기운이 긴 세월 꽂혀 있기만 하는 책의 페이지마다 스며들 듯이 묻어놓은 기억들도 불가항력적으로 바래진다. 같은 종류의 아련함을 느낀 이들은 기억 속 열화 된 이미지를 생생하게 복원해보려 애를 써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이 박제될 수 없는 것처럼 세월 속에 날아갈 색들은 다시 돌아와 착색 될 수 없다. 바람에 흩어진 민들레 씨앗들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달라붙을 수 없듯이 세월 속에서 사라진 색들은 시간의 수많은 차원들 틈새로 숨어 들어가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복원 가능하더라도, 앞서 말했듯, 그 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그 이미지가 처음 마음에 들어 온 날과 같지 않다.
감정의 층위 사이에서
화사와 박정민의 공연을 보며 내가 느낀 아련함은 어느 쪽에 가까운지 며칠을 두고 생각해 봤다. 내가 느낀 아련함은, 앞서 말했듯 불가능성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었다. 애석하지만 인정했다. 이 아련함은 안전하고 안정적인 삶을 잃을 위험을 감수하기 싫어서 열화 된 것을 억지로 복원하거나 다시 경험할 가능성이 있으나 그것을 외면한 사람의 마음이 아니다. 이 아련함은 그것의 불가능함을 깨달음 뒤에 온 감정이다. 아련함은 애초에 또렷하지 않고 희미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니 그 이미지와 감정의 복원과 반복 재생의 불가능성의 인식 뒤에 오는 감정이라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짙은 안개 속에서 서로의 위치를 잃은 채 그저 목소리만 들리는 숲 속의 두 사람을 생각해보면, 저 아련함에 담긴 흐릿함은 재차 볼 수 없을 때 드는 심정을 표현하기에 충분하지 않나 싶다. 그 아련함 뒤에 알 수 없는 느긋한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다.
박정민과 화사의 공연을 반복해서 보고나자 내 알고리즘은 소녀 가수 김유하의 노래와 일본의 재즈 뮤지션인 나호 키마마(Naho Kimama)의 영상으로, 종국에는 화사와 박정민의 다른 영상들로 인도해줬다. 나처럼 공연 영상을 본 이들이 알고리즘을 통해 결국엔 두 남녀 다른 영상에 다다를 때마다 “청룡 열차”를 타고 여기까지 왔다는 댓글을 달았다. 영상에 달린 청춘들의 댓글은 크게 두 종류여서, 두 사람이 진짜 연인이 되길 바라는 댓글과 다시 사랑을 하고 싶다는 댓글이 주를 이룬다. 그 댓글들 사이에 쉰이 넘은 아저씨의 느긋함이 낄 자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았다.
저렇게 자연스럽게 사랑의 감정을 “연기”하는 연예인을 보는 것이 얼마만이던가. 딱딱하고 엄숙한 시상식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짜인 각본대로만 말해야 하는 시상식에서는 처음 아니던가. 어느 청춘의 말처럼 영화를 위해 일한 사람들을 위한 시상식에서 영화의 참 의미를 시청자에게 전달해 준 것은 두 사람이 아니었을까? 사랑이 가능한 사람은 사랑을 꿈꾸고, 사랑을 포기한 사람에게도 사랑을 향한 열망을 일깨우고, 나와 같은 사랑의 종말을 맞이한 세대에게는 흑백의 사랑 풍경을 잠시 떠올리게 하는, 그런 영화와 같은 기능을 말이다. 그렇다면 올해 청룡영화제는 가장 영화의 의미를 되살린 시상식이리라.
![[사진=이톡뉴스AI 디자인팀]](https://i0.wp.com/livingsblog.com/wp-content/uploads/2025/12/415567_219147_4110.png?resize=900%2C6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