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컷의 물음 02] 정지된 이미지 속의 움직임 – ‘슬램덩크’의 사유 방식


한 컷의 물음 – 만화에서 만나는 동서양 인문학 02

정지된 이미지 속의 움직임 – ‘슬램덩크’의 사유 방식

: 작품 : ‘슬램덩크’∣ 철학 : 질 들뢰즈

대덕대학교 안소라 교수 

 


<슬램덩크>를 본 독자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장면이 하나씩 있다. 강백호가 공원에서 연습하는 장면이라던가, 리바운드를 하는 장면, 혹은 정대만이 안감독에게 “농구가 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장면, 강백호와 서태웅의 하이파이브 등. 




1990년에서 1996년까지 연재된 <슬램덩크>는 당대의 스포츠 만화 중 당연 최고의 자리에 위치했으며, 지금까지도 유효한 그 아성은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2022)로 이어졌다.  필자 역시 1990년대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슬램덩크>를 접했고, 농구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천둥벌거숭이 강백호가 점차 성장하는 모습에 빠져들었다. 강백호의 변화는 필자를 비롯해 독자들에게 진심을 다해 뭔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열정을 갖게 만들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슬램덩크>는 강백호의 성장서사 이외에 많은 요소들이 이야기의 재미로 작동한다. <슬램덩크>는 단순히 승패만을 다루지 않는다. 강백호가 자신을 내려놓고 팀을 위해 그토록 견제하던 서태웅에게 패스하는 장면이라던가, 체력의 한계까지 내몰린 정대만이 자신을 초월하여 슛을 하는 장면들은 경기의 승패를 떠나 한계를 넘는 인간의 드라마를 보여주며 스포츠의 본질에 대하여 말해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채치수, 송태섭, 정대만, 서태웅, 강백호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균열과 봉합은 이야기에 강한 긴장감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이노우에 다케히코(成合 雄彦)’는 감정을 과하게 드러내기보다, 절제된 장면 구성과 인물 묘사를 통해 독자가 스스로 감정을 따라가게 만든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인물에 대한 감정이입을 더욱 깊게 만들며, 이야기의 밀도를 높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감정의 밀도는 장면의 구성 방식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슬램덩크>는 한 장면, 하나의 동작을 여러 칸에 걸쳐 배열하거나 때로는 필요한 동작들을 생략하면서 정지된 만화 안에 생생한 운동감을 불어넣는다. <슬램덩크>가 특별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절제된 서사와 감정 위에 ‘운동하는 이미지’가 더해져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정지화면이 아니라, 장면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주며 독자의 감각을 깊이 자극한다. 만화의 표현 요소인 동작선, 효과음을 차치하고라도 한 장면, 하나의 동작이 여러 칸에 걸치거나 여러 칸에 표현 될 동작들이 생략되어 전개됨에 따라 움직임을 ‘감각’하게 한다. 정대만의 슛, 채치수의 리바운드, 강백호와 서태웅의 백코트 질주 등. 이 모든 장면은 ‘그림이 멈춰 있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종이 위의 정지된 그림이지만, 독자는 그 안에서 ‘움직임’을 본다. 바로 이러한 지점이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운동-이미지’ 개념과 공명한다. 


 


운동-이미지란 무엇인가?


 


질 들뢰즈는 영화 이론을 바탕으로 이미지의 작용 방식을 분석하며 ‘운동-이미지’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 개념은 단순히 사람이 걷거나 물체가 움직이는 물리적 변화만을 뜻하지 않는다. 운동-이미지는 장면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 상황의 흐름, 인물의 내면 상태까지 포함한 ‘움직임의 감각’을 가리킨다. 들뢰즈에 따르면, 움직임이란 정지된 상태들 사이를 단순히 이어붙인 것이 아니라, 감각과 감정이 점차 변해가는 연속적인 흐름이다. 즉, 한 동작에서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는 순간, 그 사이에 생기는 긴장감과 감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이 흐름을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장면 전환을 통해 표현한다. 반면, 만화에서는 칸 구성과 칸 사이의 여백(홈통, gutter)이 이 역할을 수행한다. 연속된 칸을 통해 한 장면, 하나의 동작이 나누어 표현될 때, 독자는 그 사이에서 시간의 흐름과 감정의 변화를 스스로 채워넣게 된다. 이처럼 운동-이미지는 그림이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 순간까지도 상상하게 만들며, 시각적인 장면 속에 살아 있는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슬램덩크>는 어떻게 운동을 구성하는가?


 


<슬램덩크>는 운동-이미지의 개념을 가장 탁월하게 표현한 만화 중 하나다.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농구라는 역동적인 스포츠를 정적인 만화의 언어로 풀어내며, 움직임과 감정을 동시에 표현한다. 그의 연출은 단순한 동작 묘사에 그치지 않는다. 정대만이 슛을 던지기 전, 잠시 손에 힘을 주는 순간, 수비수가 반응하는 찰나, 관중이 숨을 죽이고 바라보는 시선 등이 분절된 장면이 여러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분절의 합은 단순한 동작의 표현이 아니라, 운동의 발생과 확산, 몰입과 정서를 포괄하는 시간의 구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칸 사이의 ‘간격’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간격 속에서 의미의 생성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슬램덩크>에서 칸 간격은 물리적 시간보다 심리적 시간을 강조한다. 경기의 마지막 2분이 24권 한권 분량(완전판 프리미엄 기준)에 걸쳐 묘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느려진 시간, 반복되는 시선, 긴장 속의 정적이 독자에게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살아있는 현재’로 경험하게 만든다. 강백호가 리바운드를 잡기 위해 뛰어오르는 장면에서는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전체 움직임의 생략하여 속도감을 표현하는 반면, 착지 이후 온 힘을 다한 듯 점차 쓰러지는 모습은 칸을 나누어 표현하여 느린 속도감을 표현하는데 이는 앞선 정대만의 슛을 던질 때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찰나의 순간을 나누어 재구성된다. 각각의 장면은 독자의 뇌 속에서 연결되며, ‘운동’이란 환상을 형성하고 리듬을 생성한다. 이 환상은 정지된 그림들 사이에 ‘운동-이미지’가 깃드는 순간이다.


    


감정의 리듬과 시간의 굴절


 


운동-이미지가 단순히 물리적 변화가 아닌 ‘감각의 리듬’이라는 점에서, <슬램덩크>는 감정의 운동까지도 표현한다. 반복되는 장면 속에 감정의 차이를 배치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예컨대, 강백호가 처음엔 실수를 반복하다가, 마지막에 완벽한 리바운드를 성공시키는 장면은, 같은 동작이라도 내면의 변화와 의미의 중층을 통해 완전히 다른 감정을 전달한다. 들뢰즈의 용어로 말하면, 이는 ‘동일성 속의 차이’이며, 반복은 ‘같은 것의 반복’이 아니라, ‘다르게 반복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성은 <슬램덩크>를 단순한 스포츠 만화가 아닌 철학적 감각의 매체로 만든다. 독자는 단순히 경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경기 속에 흐르는 시간, 감정, 선택의 순간들을 따라가며, 인물과 함께 성장하는 리듬을 체험한다. 






만화 '슬램덩크'에서 마지막 산왕전.과 강백호가 부상을 당한 후 리바운드 하는 장면이다.
만화 ‘슬램덩크’에서 마지막 산왕전.과 강백호가 부상을 당한 후 리바운드 하는 장면이다.


<슬램덩크>는 정지된 이미지 속에서도 인물의 감정, 성장의 리듬, 역동적 움직임을 섬세하게 전달해낸다. 반복되는 동작 속에 감정의 진폭과 시간의 흐름을 겹쳐 넣음으로써, 단순한 경기 장면을 인간 내면의 변화로 확장시킨다. “운동은 단지 위치의 변화가 아니라, 주체가 세계와 맺는 관계 방식의 변화다”라는 들뢰즈의 말은, 바로 이 작품에서 현실화된다. 하나의 패스, 한 번의 리바운드, 짧은 정적조차 <슬램덩크> 안에서는 주체의 내면적 결단과 변화를 드러내는 운동이 된다. 이처럼 <슬램덩크>는 ‘운동-이미지’의 개념을 가장 치밀하고도 감각적으로 구현한 만화이며, 스포츠 서사의 외피 속에 철학적 감각을 담아낸 시각적 사유의 공간이 되었다. 


필자 –  안소라

공주대학교 만화예술학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웹툰의 컬러 역할 연구>로 석사를, <찰스 슐츠의 《PEANUTS》 분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만화영상진흥원 <웹툰창작체험관-심화과정>교육 교재 집필 및 조안 한국어 교재 삽화, 웅직백제역사관 일러스트, 한중일 문화교류 일러스트 등을 제작하였다. 공주대학교, 배재대학교, 한국 영상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현재 대덕대학교 k-웹툰과에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 질 들뢰즈

질 들뢰즈(1925~1995)는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로, 기존 철학의

체계적이고 고정된 틀을 해체하며 새로운 사유 방식을 제안했다. 그는 전통적인 ‘존재’나 ‘본질’ 개념보다 차이, 반복, 흐름, 생성 같은 개념에 주목하며, 철학을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사고의 장으로 확장시켰다.

대표 저작으로는 <차이와 반복>(1968), <의미의 논리>(1969), 그리고 펠릭스 가타리와의 공저인 <안티 오이디푸스>(1972), 『천 개의 고원』(1980) 등이 있다. 들뢰즈는 칸트, 니체, 베르그송, 스피노자 등 철학사 속 인물들을 새롭게

재해석하며, 철학을 하나의 ‘개념 만들기’의 실천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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