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컷의 물음 – 만화에서 만나는 동서양 인문학 03
<유미의 세포들>과 데리다의 ‘원문자’
: 감정은 원래부터 있었을까?
작품 : <유미의 세포들> ∣ 철학 : 자크 데리다
대덕대학교 안소라 교수
“지금부터 들려드릴 유미와 그녀의 뇌세포들의 이야기.”
웹툰 <유미의 세포들> 오프닝의 마지막 문장이다. <유미의 세포들>은 이동건 작가의 인기 작품으로, 주인공 유미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세포들’을 통해 그녀의 감정, 사고, 욕망, 기억 등을 유쾌하게 시각화한 웹툰이다. 사랑세포, 이성세포, 출출세포, 감정세포, 응큼세포 등 유미의 행동과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세포들이 등장하며, 각 세포는 특정 감정이나 욕망의 화신처럼 움직인다.
이 작품은 일상적인 연애와 직장 생활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하면서 복잡한 내면을 의인화된 캐릭터로 풀어내는 연출 방식이 특징이다. 주인공 유미의 머릿속에 사는 수많은 ‘세포들’은 (유미의) 감정, 생각, 욕망, 논리 등의 내면을 시각적으로 잘 보여준다. 유미가 설레면 ‘사랑세포’가, 배가 고프면 ‘출출세포’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응큼세포는 시도 때도 없이 쏟아내는 이러저러한 말로 다른 세포들의 핀잔을 받는다. 독자들은 이 세포들이 모여 유미라는 한 사람의 인격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과연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원래부터’ 존재했던 걸일까? 아니면 특정 ‘기호’나 ‘구조’가 그 감정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이 질문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사유와 맞닿아 있다. 특히 그의 핵심 개념인 ‘원문자(archi-écriture)’ 개념은 <유미의 세포들>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흥미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그림 2] '유미의 세포들'에 등장하는 '응큼세포'.](https://i0.wp.com/livingsblog.com/wp-content/uploads/2025/08/1227_2522_378.png?w=900)
후기 구조주의의 등장: 의미의 유동성
데리다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속한 ‘후기 구조주의’라는 철학적 흐름을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시작된 구조주의는 언어, 신화, 사회 제도 등 모든 현상에 숨겨진 보편적인 ‘구조’를 찾아내려고 했다. 구조주의는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소쉬르는 언어의 의미가 단어 하나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언어를 단어들 사이의 ‘관계’와 ‘차이’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하나의 단어는 혼자 있을 때보다, 다른 단어들과 비교될 때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밤’이라는 단어는 ‘낮’과의 차이를 통해 의미를 얻는다. ‘밤은 어두운 시간’이고, ‘낮은 밝은 시간’이라는 정의도 결국 서로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이렇게 언어는 고정된 뜻을 갖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변 단어들과의 관계 안에서 의미를 조정하며 살아 움직인다. 소쉬르의 이론은 우리가 언어를 바라보는 방식에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어 냈다. 단어는 단순히 이름표가 아니라, 전체 시스템 속에서 그 자리를 배정받는 유동적인 기호인 것이다. 데리다, 들뢰즈와 같은 후기 구조주의자들은 이러한 구조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끊임없이 변화하고 해체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어떤 의미나 진리도 영원불변하게 존재하지 않으며, 항상 다른 의미와의 관계 속에서 유동적으로 형성된다고 보았다.
데리다는 특히 ‘언어’가 의미를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미를 끊임없이 미루고 분산시킨다고 보았는데,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원문자’ 개념으로 이어진다.
데리다의 ‘원문자’: 감정보다 기호가 먼저일 수 있다.
우리는 흔히 ‘감정’이나 ‘생각’이 먼저 존재하고, 그 후에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말’이나 ‘글’을 사용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슬픔’이라는 감정을 먼저 느끼고 나서 “나는 슬퍼”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데리다는 이러한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며, 오히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나 ‘기호’, ‘표현 방식’ 그 자체가 감정과 생각을 ‘형성’하고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원문자’의 핵심이다. 여기서 데리다가 말하는 ‘문자(écriture)’는 단순히 글자나 텍스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흔적, 기호, 구조, 시스템, 또는 차이를 만들어 내는 모든 형태의 ‘표현’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개념이다. 우리의 감정이나 생각이 언어적 구조, 사회적 규범, 문화적 코드와 같은 ‘원문자’에 의해 미리 새겨지고 구성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슬픔’을 느꼈을 때, 아이는 단순히 불쾌한 감각을 경험할 뿐이다. 하지만 부모가 “우리 아기가 슬프구나”라고 말해주거나, 아이가 슬픔을 표현하는 특정 행동(울음, 찡그림)을 학습하면서 그 불쾌한 감각은 점차 ‘슬픔’이라는 이름의 명확한 감정으로 ‘구성’된다. ‘슬픔’이라는 ‘기호(원문자)’가 그 감각에 의미를 부여하고 형태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만약 ‘슬픔’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면, 우리는 그저 막연한 불쾌감만 느낄 뿐, 그것을 ‘슬픔’이라고 인지하거나 분류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인간의 언어처럼 열린 의미를 지닌 기호 체계가 없는 동물들과 비교하면 더 분명해진다. 대부분의 동물은 특정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신호 체계를 통해 소통하며, 복잡한 감정 구분이나 의미 해석은 할 수 없다.
<유미의 세포들> 속 ‘원문자’로서의 세포들
이러한 데리다의 ‘원문자’ 개념을 『유미의 세포들』에 대입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림 3] '유미의 세포들'에 등장하는 사랑세포.](https://i0.wp.com/livingsblog.com/wp-content/uploads/2025/08/1227_2523_3757.jpg?w=900)
웹툰 속 유미의 ‘세포들’은 단순히 유미의 감정을 ‘표현’하는 존재가 아니라 유미의 감정을 ‘창조’하고 ‘구성’하는 ‘원문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유미가 처음 웅이에게 호감을 느꼈을 때를 생각해보자. 그녀는 막연히 좋은 감정을 느꼈을 수 있지만, ‘사랑세포’가 활성화되고 사랑이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그 감정의 정체를 명확히 알지 못한다. 사랑세포가 ‘사랑’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그에 맞는 행동 양식(두근거림, 상대방 생각하기 등)을 유도하면서 비로소 유미는 자신이 ‘사랑’에 빠졌음을 인지하게 된다. 즉, ‘사랑세포’라는 ‘원문자’가 유미의 내면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구체적으로 형성하는 것이다. 또한 유미가 남자친구 웅이와 다른 여자의 친밀한 모습을 보고 불쾌감을 느낄 때, 그 불쾌감이 ‘질투’라는 이름으로 처음부터 존재했을까? ‘질투세포’가 질투임을 선언하며 작동하기 시작할 때, 유미는 비로소 자신이 느끼는 복잡한 감정(소유욕, 불안감, 분노 등)을 ‘질투’라는 하나의 명확한 감정으로 인지하고 분류하게 된다. 질투세포라는 ‘원문자’가 유미의 경험에 ‘질투’라는 의미를 새겨 넣는 것이다.
이처럼 <유미의 세포들>에서 감정은 ‘안에서부터’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질투’, ‘슬픔’과 같은 이름의 세포들이 먼저 존재하면서 그 감정들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감정을 설명하는 구조(세포의 이름, 기능)가 감정 자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주체’는 미리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다
<유미의 세포들>이 데리다의 관점에서 더욱 특별한 이유는 바로 ‘유미’라는 ‘주체’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유미는 단단하고 고정된 ‘자아’를 가진 존재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는 ‘사랑세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또는 ‘감성세포’와 ‘이성세포’가 어떤 갈등을 벌이느냐에 따라 매 순간 다르게 행동하고 변화한다. 유미는 언제나 유동적이며, 새로운 상황에 따라 세포들의 조합이 달라지면서 새롭게 ‘조립’, ‘구성’된다.
이는 데리다가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언어적 차이와 반복 속에서 계속 만들어지고 해체되는 ‘흐름’에 가깝다고 본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유미의 세포들> 속 유미는 바로 그 흐름 위에 있다. 다양한 감정 세포들, 즉 ‘원문자’들이 모이고 흩어지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 속에서, 유미는 매 순간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녀의 ‘프라임 세포’가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것 역시 유미의 자아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우선순위와 맥락에 따라 재구성됨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치다.
감정은 번역된다 : ‘차연(différance)’의 공간
<유미의 세포들>을 읽다 보면, 세포들이 때때로 서로 말이 안 통하거나 오해하는 장면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랑세포는 감정을 키우고 싶어 하는데, 이성세포가 제지하는 식이다.
감정은 우리의 내면에서 언제나 ‘통역’과 ‘번역’의 과정을 거친다.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진 세포들이 ‘유미’라는 한 존재 안에서 상호작용할 때, 필연적으로 오해와 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이때 각 세포는 자기 관점에서 상황을 해석하고, 다른 세포의 의도를 자기 방식으로 ‘통역’하거나 ‘번역’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본래의 의도가 왜곡되거나, 서로의 언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도 벌어진다. 마치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대화할 때 통역을 거치더라도 미묘한 뉘앙스나 배경을 놓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는 데리다의 핵심 개념인 ‘차연(différance)’과도 깊이 연결된다. 데리다는 어떤 기호도 고정된, 단일한 의미를 가지지 않으며, 항상 다른 기호와의 ‘차이’ 속에서만 의미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의미는 끊임없이 ‘미루어지고(deferring)’ ‘달라지는(differing)’ 특성을 가지는데, 이것이 바로 ‘차연’이다. 즉, 의미는 결코 완전히 ‘현재’에 포착되지 않고, 항상 다른 기호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며 끊임없이 유동하는 것이다.
<유미의 세포들> 속 세포들 간의 갈등은 바로 이러한 ‘차연’의 공간에서 발생한다. 사랑세포가 말하는 ‘좋아함’과 이성세포가 말하는 ‘합리성’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존재한다. 이 간극은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서로 다른 ‘기호 체계’가 만나 의미를 ‘번역’하려는 과정에서 생기는 필연적인 ‘차이’이다. 감정은 이러한 번역과 차이의 과정 속에서 비로소 구체적인 형태로 변화하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감정 속에서 태어나는 우리
<유미의 세포들>은 귀엽고 유쾌한 그림체로 시작하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복잡한 감정 구조와 자아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질문이 담겨 있다. 데리다의 ‘원문자’ 개념과 후기 구조주의적 관점으로 이 작품을 바라보면 단순한 감정 묘사를 넘어서는 걸 발견하게 된다. 감정을 만들어내는 기호의 체계, 감정과 언어의 얽힘,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끊임없이 구성되고 해체되는지를 보여주는 철학적인 드라마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감정을 단순히 ‘느끼는’ 존재가 아니라, 어쩌면 ‘감정’이라는 이름의 ‘원문자’들 속에서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유미처럼.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
20세기 후반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철학자로, 이른바 ‘해체(deconstruction)’라는 사유 방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데리다는 전통 서양 철학이 전제해 온 이분법적 구도—예컨대 말과 글, 중심과 주변, 본질과 현상—을 비판하며, 의미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끝없이 미루어지고 흔들리는 차이의 관계 속에서만 형성된다고 주장하였다. 대표 저작으로는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De la grammatologie)>, <차연(La différance)>, <해체란 무엇인가(Positions)> 등이 있다.
⊙ 필자 안소라 교수
공주대학교 만화예술학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웹툰의 컬러 역할 연구> 로 석사를, <찰스 슐츠의 <PEANUTS> 분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만화영상진흥원 웹툰창작체험관 심화과정 교육 교재 집필 및 조안 한국어 교재 삽화, 웅직백제역사관 일러스트 , 한중일 문화교류 일러스트 등을 제작하였다. 공주대학교, 배재대학교, 한국 영상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현재 대덕대학교 K-웹툰과에서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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