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컷의 물음 06] 나는 하나의 실체인가? 아니면 흐름인가? : ‘공각기동대’ 


[한 컷의 물음 06] 만화에서 만나는 동서양 인문학

나는 하나의 실체인가? 아니면 흐름인가? : ‘공각기동대’ 

작품 :  <공각기동대> ∣ 철학 : 들뢰즈/가타리의 ‘되기(becoming)’

대덕대학교 안소라 교수


20대 시절에 봤던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1995)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애니메이션이었다. <공각기동대>가 던지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은 재미있는 만화만을 찾던 필자에게 너무 생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경하기까지 했던 이 작품은 만화의 본질의 탐구하게 만들었고, 만화 작품을 철학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만들게 했다. 그만큼 <공각기동대>는 필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작품이다. 이러한 영향력은 필자에게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던 <매트릭스>(1999) 감독인 워쇼스키 자매(원래는 형제였으나 성전환을 하였다.) 역시 여러 인터뷰를 통해 <공각기동대>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언급하였다.  


그동안 주로 만화를 다루었지만 이번 칼럼에서는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을 다루어보려고 한다. 출판만화로 제작되었던 시로 마사무네의 <공각기동대>와 이를 각색한 애니메이션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원작만화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서사의 재미에 무게를 두었다면, 애니메이션은 같은 설정이지만 인간 존재의 근본 문제를 전면에 끌어올렸다. 만화 원작이 있음에도 애니메이션을 분석하는 이유는 애니메이션이 자아와 정체성, 인간과 기계의 경계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서사적 재미를 넘어 존재론적 문제를 전면화하면서 철학적 텍스트로서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물론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의 자아와 정체성에 대한 주제는 이미 많은 논문과 칼럼들에서 다뤄진 바가 있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논의되어 온 주제라 하더라도, 현재의 시대적 맥락 속에서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뇌와 기계가 결합하고, 네트워크를 통해 의식이 연결되는 세계관을 가진 <공각기동대>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주인공 쿠사나기 소령의 주체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이 작품이 철학적으로 돋보이는 이유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단순한 사이버펑크 SF물이 아니라, 정체성과 자아의 문제를 깊이 사유하는 철학적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천둥벌거숭이와 같은 사유를 하던 20대를 지나 어느덧 세상과 필자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나이가 되고 나서야, 다시 이 작품 살피는 지금, 감회가 새롭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말들이 이제는 피부로 와 닿는다. 특히,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더 이상 철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AI와 인간이 서로 침투하고, 디지털 정체성이 현실의 얼굴을 대체해가는 지금, ‘되기(becoming)’의 철학은 <공각기동대>를 새롭게 읽게 만든다.




                           


‘되기(becoming)’란 무엇인가.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1980)에서 주체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이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되는 흐름이며, 그 경계는 언제나 유동적이라는 뜻이다. 이 개념을 통해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는 명확한 경계를 가진, 기존의 자아나 과거의 경험, 기억, 육체, 사회적 역할 등이 유지되는 연속성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과거의 개념을 전복한다. <공각기동대>에서 쿠사나기 소령이 그러한 존재이다. 쿠사나기 소령은 어릴 적 사고로 신체의 대부분을 잃고 기계 몸을 가진 채 살아가지만, 여전히 자신의 존재를 인간이라고 느낀다. 하지만 그녀가 가진 기억이 자신의 경험에 기반한 진짜인지, 누군가에 의해 삽입된 인위적인 정보인지 알 수 없다. 자신이 누구였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 쿠사나기 소령은 자아의 경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계속해서 의심하고 탐색한다. 쿠사나기 소령은 인간이기를 멈춘 존재이자, 인간으로 계속 남고자 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그 경계 자체를 흐리는 존재이다.


 


리좀(rhizome)적 존재


 


들뢰즈와 가타리는 인간을 중심-말단 구조의 나무가 아닌 ‘리좀’으로 보자고 주장한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인간 존재를 뿌리가 하나이고, 줄기가 중심이 되어 가지가 뻗어나가는 나무 구조로 이해해왔다. 이 구조는 시작과 끝, 원인과 결과, 중심과 주변이 뚜렷하게 나뉘는 방식이다. 하지만 리좀은 다르다. 리좀은 감자줄기처럼 어디서든 뻗어나가고 연결되는 뿌리의 네트워크다. 어느 한 지점을 줌심이라 말할 수 없고, 시작과 끝이 없다. 그저 계속해서 자라고, 옮겨가고, 연결될 뿐이다. 현재의 우리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가족, 친구, 직장, 커뮤니티 등의 다양한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고, 어느 하나로 고정되거나 대표되기 어렵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다른 얼굴을 하고 다른 방식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유동성과 다층적 연결이 ‘리좀’적인 존재 방식이다. 


쿠사나기 소령 또한 바로 이러한 리좀적 존재이다. 쿠사나기는 하나의 고정된 자아가 아니라, 기억과 기계, 네트워크, 신체를 따라 유동적으로 흘러가는 정체성의 흐름이며, 끊임없이 생성되고 연결되는 ‘되기’의 상태로 살아간다. 즉 “나는 누구인가가?”가 아닌 “나는 지금 어떤 흐름 속에 있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작품 속에서 쿠사나기 소령은 스스로의 기억을 의심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과거는 진짜인지, 타자와의 경계는 어디인지 불분명하다. 타인의 기억을 접속하거나, 고스트를 해킹하는 경험을 통해 자아는 오염되고 분열된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의 관점에서 이것은 주체의 해체, 자아의 상실이라는 위기가 아니다. 이는 곧 ‘되기’의 조건, 생성의 가능성이다. 쿠사나기 소령은 나라는 고정된 중심이 아니라 끊임없이 타자와 교차하면서 변이하는 지점으로 존재한다. 다시 말해 고정된 주체가 아닌 복수적 주체의 결정체인 것이다. 


 


되기-없음의 도달 


 


작품의 후반 쿠사나기 소령은 자신이 쫒던 인형사와의 융합을 통해 유아형 신체와 새로운 목소리가 결합된 전혀 다른 존재로 재탄생한다. 이전의 육체도 아니고, 이전의 기억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쿠사나기 소령이라는 인식은 유지한다. 완전한 탈주체화이자 새로운 ‘되기’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더 이상 인간도 기계도 아닌, 흐름 그 자체가 된다. 바로 이 지점이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시하는 ‘되기-없음’, 즉 규정 불가능한 정체성이자, <공각기동대>가 제시하는 탈주체적 존재론의 핵심이다. 


[그림 2] 화면 왼쪽의 금발머리가 인형사, 오른쪽 검은 머리가 쿠사나기 소령. 전투 후 몸체가 부서져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게 되자 인형사와의 융합을 선택한다. 이미지 출처 : 아트 인사이트 https://www.artinsight.co.kr/
[그림 2] 화면 왼쪽의 금발머리가 인형사, 오른쪽 검은 머리가 쿠사나기 소령. 전투 후 몸체가 부서져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게 되자 인형사와의 융합을 선택한다. 이미지 출처 : 아트 인사이트 https://www.artinsight.co.kr/


흐름으로 존재하는 자아


 


<공각기동대>가 던지는 철학적 질문은 단순히 쿠사나기 소령의 정체성 혼란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작품은 단일하고 연속적인 자아, 고정된 실체로서 나라는 인간의 존재를 정의하던 과거의 개념을 흔든다. 쿠사나기 소령의 고뇌는 자신이 기억하는 과거가 조작되었을 수 있고 감각조차 기계에 의해 전달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존재론적으로 우리가 신체의 감각과 뇌의 신경물질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존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한 사회적 존재로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과 기술의 경계가 무너지고, 자아는 SNS와 데이터 속에서 복제되고 재구성된다. 쿠사나기 소령의 정체성 위기는 곧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현실의 나와 SNS 속의 나는 다르고 알고리즘, 추천 콘텐츠들이 나를 대신한다. 우리의 자아는 이제 하나의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환경, 관계, 기술, 이미지 속에서 재조합되고 복제되는 데이터적인 자아로 확장되고 있다.


과연 우리는 여전히 하나의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쿠사나기 소령처럼 매 순간 바뀌고 연결되며, 자신을 구성해나가는 되기의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질 들뢰즈

질 들뢰즈(1925~1995)는 프랑스 현대철학을 대표하는 사상가로, 차이와 생성, 시간과 이미지에 대한 독창적 사유를 전개했다. <차이와 반복>, <의미의 논리>와 같은 저서에서 철학의 전통적 범주를 새롭게 해석했으며, 영화 이론서 <시네마 1, 2>에서는 운동·시간 이미지 개념을 통해 영화와 철학을 접목하였다. 정신분석가 펠릭스 가타리와 함께 <안티 오이디푸스>, <천개의 고원>을 집필하며, 고정된 주체와 권력 구조를 해체하고 끊임없는 ‘되기(becoming)’와 ‘리좀적 사유’를 제시했다.

 

펠릭스 가타리

펠릭스 가타리(1930~1992)는 프랑스의 정신분석가이자 철학자, 사회운동가로, 무의식과 욕망을 사회적 맥락 속에서 새롭게 이해하려 했다. 정신분석학의 오이디푸스 중심적 해석을 비판하며, 욕망을 억압이 아닌 창조적 힘으로 보았다. 질 들뢰즈와 함께 <안티 오이디푸스>, <천개의 고원>을 집필하며 ‘탈코드화’, ‘되기(becoming)’, ‘리좀’과 같은 개념을 발전시켜 현대 철학과 문화 이론에 영향을 끼쳤다. 


필자 안소라 교수

공주대학교 만화예술학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웹툰의 컬러 역할 연구> 로 석사를, <찰스 슐츠의 분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만화영상진흥원 웹툰창작체험관 심화과정 교육 교재 집필 및 조안 한국어 교재 삽화, 웅직백제역사관 일러스트 , 한중일 문화교류 일러스트 등을 제작하였다. 공주대학교, 배재대학교, 한국 영상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현재 대덕대학교 K-웹툰과에서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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