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컷의 물음 07] 낯선 자와 마을의 법 : ‘이끼’ 


[한 컷의 물음 07] 만화에서 만나는 동서양 인문학

낯선 자와 마을의 법 

작품 :  <이끼> ∣ 철학 : 라캉의 상징계

대덕대학교 안소라 교수


우리는 종종 외부인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배척하기도 한다. 흔히 ‘텃세’라 부르는 이 행동과 그 반응을 통해 공동체가 가진 시스템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동안 아무 일 없는 듯 유지되던 질서가 흔들리고, 감춰져 있던 규칙이 드러난다.


윤태호 작가의 <이끼>는 류해국이라는 개인이 폐쇄적인 산골 마을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미스터리와 스릴러의 장르적 특성을 강하게 띠며 영화로 제작될 만큼 많은 인기를 얻었다. 언뜻 주인공이 마을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이 작품에 대해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 인터뷰를 통해 작품이 단순한 서사적 긴장을 넘어, 사회 시스템에 대한 작가의 비판 의식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끼>는 표면적으로는 범죄 스릴러로 그려지지만 그 속에는 타자와 공동체의 긴장, 법과 규범의 작동 방식에 대한 날카로운 사유가 숨어있는 것이다. 이번 칼럼은 자크 라캉의 타자 개념을 빌려, <이끼>에서 표현되고 있는 공동체와 균열을 말하고자 한다. 


그림 1 ‘이끼’, 윤태호, 카카오웹툰 [교보문고 갈무리]
그림 1 ‘이끼’, 윤태호, 카카오웹툰 [교보문고 갈무리]


 


라캉의 세 가지 세계와 타자 


라캉은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를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라는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상상계는 거울 속 세계와 같다. 아기가 거울을 보고 “저게 나구나”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거울 속 모습은 실제와 일치하지 않는다. 이미지를 통해 자신을 파악하는 단계이기에 언제나 불안정하다. 이때의 ‘다른 것’은 소타자, 즉 나와 닮았지만 나와는 다른 존재다. 


상징계는 언어와 규범, 사회적 질서의 세계이다. 인간은 언어를 배우는 순간부터 상징계 안으로 들어온다. 상징계가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때, 라캉은 그것을 대타자라고 지칭했다. 대타자는 특정 개인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눈과 귀, 권위와 규범을 대표한다. 우리는 대타자의 언어로 말하고, 대타자의 규칙 속에서만 욕망을 표현한다. 


실재계는 언어나 이미지로 결코 포착되지 않는 세계이다. 상상계와 상징계로도 다 설명되지 않는 것, 끝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 실재계는 종종 불안과 공포로 다가온다. 이것은 일종의 ‘극한의 타자성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처음부터 타자를 통해 자신을 인식하고, 타자의 언어 속에서만 살아간다. 타자는 곧 우리 존재의 조건이자, 동시에 불안을 불러오는 균열의 자리이다. 


2010년 개봉된 영화 ‘이끼’ 포스터.
2010년 개봉된 영화 ‘이끼’ 포스터.


 


마을이라는 상징계와 대타자


<이끼>의 마을은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다. 윤태호 작가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 마을이  과거와 단절된 채 누군가의 필요성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자, 세속적 욕망이 공동체의 미덕을 대체한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말한다. 또한 외부의 법이나 도덕적 기준과는 별개로, 과거의 죄악을 은폐하고 이를 공유하는 행위를 존속의 기반으로 삼는 자체적인 ‘상징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 상징계의 중심에는 이장 천용덕이 있다. 천용덕은 단순히 탐욕스러운 개인이 아니라, 마을 전체를 하나의 무대로 삼아 연출하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주민들의 죽음마저도 마땅한 결말로 정당화하며, 주인공 류해국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한다. 이는 그가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마을이라는 거대한 질서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이장 천용덕은 라캉이 말한 대타자, 즉 마을의 상징계가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난 현신이라 할 수 있다. 


그림 2 이장 천용덕. [카카오웹툰 ‘이끼’ 2화 갈무리]
그림 2 이장 천용덕. [카카오웹툰 ‘이끼’ 2화 갈무리]


             


류해국과 ‘아버지의 이름’


반대로 류해국은 이 마을 시스템에 균열을 일으키는 존재이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찾으려는 순수한 집요함과 호기심의 욕망으로 움직이지만, 마을이라는 상징계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라캉에 따르면 상징계는 개인의 행위를 의미화하고 규율하는 기능을 한다. 즉 개인은 상징계의 질서에 따라야 하지만 류해국은 그 질서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인정받기를 바랐지만 마을 시스템은 그를 이물질로 낙인찍으며 제거하려 한다. 


여기에는 아버지의 부재라는 문제가 겹쳐 있다. 라캉이 말한 ‘아버지의 이름‘은 아이를 사회적 질서로 편입시키는 상징적 기능이다. 그러나 류해국의 아버지 유목형은 세속을 떠나 신의 자리를 넘보며 오히려 또 다른 전능한 대타자가 되려고 했다. 그 결과 해국은 상징계의 질서를 제대로 매개받지 못한 채, 사회와 불완전하게 연결된 분열된 주체가 되었다. 그의 마을 방문은 표면적으로는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찾는 일이었지만, 동시에 자신이 거부당했던 사회, 즉 상징계로 다시 들어가려는 무의식적인 시도였다. 그러나 이미 결핍된 주체는 다시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그림 3 류해국, [카카오웹툰 ‘이끼’ 1화 갈무리]
그림 3 류해국, [카카오웹툰 ‘이끼’ 1화 갈무리]


 


균열을 드러내는 패배


<이끼>에서 해국은 마지막에 “저는 이번에도 이긴 것 같지만 졌네요.”라고 말한다. 그는 부조리를 폭로하는 데 성공했지만, 동시에 사회적 질서 속에서 개인으로서의 삶이 파괴되었음을 인정한다. 이는 라캉이 말하는 비극적 역설과 닮아있다. 상징계가 균열을 드러내는 순간, 주체 역시 무너진다는 점이다. 류해국의 패배는 곧 마을 시스템의 승리이자, 주체로서 그의 운명이 비극적으로 완성되는 순간이다.


<이끼>는 단순히 한 시골 마을의 범죄극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질서와 개인의 욕망이 충돌할 때 벌어지는 모순과 긴장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구조는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여전히 낯선 이방인은 배척되고, 문제를 드러내는 사람은 공동체를 위협하는 존재로 취급된다. 침묵과 동조가 안전의 조건처럼 요구되고, 균열을 드러내는 목소리는 불편한 잡음으로 여겨진다. 라캉의 말을 빌리자면, 대타자는 결코 완전하지 않다. 질서는 언제나 균열을 안고 있으며, 그 균열은 외부인에 의해 혹은 개인의 욕망으로 드러난다. 


<이끼>는 2007년 연재작이지만 그 문제의식은 현재진행형이다. 불편한 질문을 억누르며, 침묵과 동조를 통해 질서를 유지하려는 모습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균열을 드러내는 목소리를 위험한 잡음으로 지워버릴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통해 질서의 허상을 직시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갈 것인가.


자크 라캉

자크 라캉(1901~1981)은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로 프로이드의 이론을 계승하면서 언어학과 구조주의를 결합해 무의식을 새롭게 해석했다. 인간은 언어와 규범, 즉 상징계 속에서만 주체가 된다고 보았으며, 타자·욕망·아버지의 이름 같은 개념으로 현대 철학과 인문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필자 안소라 교수

공주대학교 만화예술학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웹툰의 컬러 역할 연구> 로 석사를, <찰스 슐츠의 분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만화영상진흥원 웹툰창작체험관 심화과정 교육 교재 집필 및 조안 한국어 교재 삽화, 웅직백제역사관 일러스트 , 한중일 문화교류 일러스트 등을 제작하였다. 공주대학교, 배재대학교, 한국 영상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현재 대덕대학교 K-웹툰과에서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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