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컷의 물음 09] 만화에서 만나는 동서양 인문학
<아수라>와 들뢰즈의 주름 : 콜라주인가, 하나의 우주인가?
작품 : <아수라> ∣ 철학 : 들뢰즈의 주름
대덕대학교 안소라 교수
2025년 부천만화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한 <아수라>는 불사의 비밀을 알아오라는 임무를 받고 떠났던 대장이 노인이 되어 중원으로 돌아오면서 시작하는 이야기이다. 대장의 곁에는 정체불명의 소년 ‘아수라’가 함께하지만, 이들이 어떻게 만났고 왜 돌아왔는지는 아직 베일에 쌓여있다. 문정후 작가의 건강 문제로 휴재에 들어간 지금, 독자들의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간다. 하지만 <아수라>는 지금까지 전재된 내용만으로도 명작이라는 찬사와 산만하고 난해한 망작이라는 극단적인 평가를 동시에 이끌어내며 독자 담론의 중심에 섰다.
출판만화 시절부터 이어진 작가의 심도 있는 그림과 연출은 독자를 압도하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기묘한 세계관은 철학적 사유를 요구한다. 하지만 기묘한 세계관은 장르의 일반적인 문법을 벗어나다보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이 극단적인 평가야말로 <아수라>가 평범한 장르물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일지 모른다. 그런다면 이 기묘하고 매력적인 동시에 논쟁적인 세계관의 비밀은 무엇일까.
<아수라>의 세계는 언뜻 보기에는 뒤죽박죽이다. 무림 고수들이 내공을 겨루는 무협의 틀 안에 불로불사의 약에 얽힌 인간의 오랜 숙원이 끼어든다. 주인공의 이름 ‘아수라’는 인도 신화에서 왔고, 갑자기 서양 중세의 ‘교황청’이 등장한다. 유럽 연금술의 전통에서 온 상상의 존재인 불의 정령 ‘살라만드라’가 포효하고, 동화 <잭과 콩나무>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나무가 하늘을 찌른다. 그리고 공간을 이동하는 ‘타키온(Tachyon- 물리학에서 빛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입자)까지 아수라와 대장의 마차를 끄는 말로 등장한다. 이 기묘한 공존은 작품 속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전제된다. 이들 각각은 다른 세계에서 온 침입자가 아니라, 마치 소림사나 무당파처럼 무림의 판도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로 처음부터 자리 잡고 있다. 작품은 이들의 존재 이유를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 서로 다른 세계가 섞이는 자리가 아니라, 처음부터 서로 다른 세계들이 하나의 세계로 접혀 있는 자리에서 작품의 의미가 드러난다. <아수라>의 세계는 분리된 층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과 신화, 철학이 하나의 면 위에 접혀있는 구조다. 서로 다른 세계가 섞이는 자리가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로 접혀 있는 자리. 이는 들뢰즈가 말한 ’주름‘의 개념과 닮아있다. <아수라>의 서사는 세계의 통합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다른 세계들이 분리되지 않는 채 한 몸처럼 겹쳐 있는 상태, 그 미묘하고 낯선 공존 속에서 기묘한 생명력을 얻는다. <아수라>가 어떤 독자에게는 명작으로 어떤 이에게는 난해한 망작으로 느껴지는 이유일 것이다.
![웹툰 '아수라'에 등장하는 '잭과 콩나무'를 연상하게 하는 나무. [네이버 웹툰 갈무리]](https://i0.wp.com/livingsblog.com/wp-content/uploads/2025/10/1467_3085_2141.png?w=900) 
익숙한 개념들 – 퓨전, 크로스오버, 패러디, 오마주, 그리고 주름
들뢰즈가 제시하는 ‘주름’을 이야기하기 전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다른 개념들과의 차이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웹툰에서는 동양과 서양의 세계관을 섞는 시도가 낯설지 않다. 이전 칼럼에서 언급했던 구아진 작가의 <미래의 골동품 가게> 또한 퇴마라는 하나의 공통된 주제 아래 동양과 서양이 만나 협력한다. 퓨전, 크로스오버, 패러디, 오마주 등은 다른 이질적인 것들이 섞인다는데에서 주름과 유사해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을 살피면 제각각 다른 점을 알 수 있다. 퓨전은 서로 다른 장르를 합쳐 새로운 규칙을 가진 장르로 만드는 것에 가깝다. 마치 밀가루와 팥을 합쳐 찐빵을 만드는 것처럼, 각 재료가 녹아들어 새로운 결과물이 된다. 크로스오버는 각자 독립된 세계관을 가진 주인공들이 하나의 작품에서 만나는 것이다. 마블 영화에서 아이언맨과 토르가 만나 듯, 두 세계는 각자의 규칙을 유지한 채 잠시 조우한다. 두 세계가 만나는 개념들은 퓨전과 크로스오버 말고도 패러디와 오마주가 있다. 패러디와 오마주는 반드시 원본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패러디는 원본을 비틀어 웃음을 유발하고, 오마주는 원본에 대한 존경을 담아 인용한다. 이 두 개념 모두 수용자들이 원본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알게 될 때 그 의미가 완성 된다. 다시 말해 원본과 인용된 것 사이에는 명확한 경계와 거리가 존재한다. 하지만 주름은 이 모든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위의 개념들이 모두 분리되어 있는 세계를 합치거나 인용한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주름을 처음부터 모든 것은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거대한 세계였다고 말한다. 아수라의 교황청은 현실의 교황청을 패러디한 것도, 오마주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외부 세계의 인용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 세계의 일부로 존재하는 본문 그 자체다. 공존 그 자체가 이 세계의 유일한 법칙이라는 점이 바로 주름의 관점이다.
![웹툰 '아수라'에 나오는 공간을 이동하는 말. [네이버 웹툰 갈무리]](https://i0.wp.com/livingsblog.com/wp-content/uploads/2025/10/1467_3086_2229.png?w=900) 
세계가 접히는 방식, ‘주름’
거대하고 부드러운 천을 상상해보자. 천의 한쪽 끝에는 동양의 산수화가 다른 쪽 끝에는 서양의 성당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천을 마구잡이로 구기고 접으면 어떻게 될까. 산수화의 소나무 가지 옆에 성당의 첨탑이 자리하게 될 것이다. 둘은 원래 멀리 떨어진 풍경이지만, ‘접힘’이라는 행위를 통해 나란히 붙어 있는 하나의 풍경이 된다. 이때 소나무와 성당은 단순히 이웃이 되는 것을 넘어 서로를 미묘하게 비춘다. 성당의 그림자는 소나무의 결을 따라 흐르고, 소나무에 부는 바람은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 햇빛을 반사시킨다. 이처럼 주름은 분리된 것들을 병치시키는 것을 넘어, 그것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복잡하고 새로운 무늬를 만들어 내는 상태를 말한다. <아수라>의 세계가 바로 이 주름진 천과 같다. <아수라>에 등장하는 교황청은 무림을 흉내 내는 집단이 아닐 것이며, ‘살라만드라’는 무협 세계에 잠시 놀러온 손님이 아니다. 동양의 무협, 서양의 판타지, 인도의 신화는 각자 다른 재료가 아니라, 하나의 우주라는 천이 복잡하게 접히면서 만들어진 다양한 결이자 무늬인 셈이다.
![웹툰 '아수라'에 나오는 불의 정령 '살라만드라'와 교황청에 대한 언급 장면. [네이버 웹툰 갈무리]](https://i0.wp.com/livingsblog.com/wp-content/uploads/2025/10/1467_3087_2325.png?w=900) 
주름 사이를 가로지르는 주인공의 여정
앞서 언급했던 대로 <아수라>의 이야기는 불로불사의 약을 찾아 떠났던 대장이 노인이 되어 중원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수라와 대장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은 어느새 장르의 경계를 잊어버리게 된다. 무협지를 보는 듯 했지만 자연스럽게 판타지소설 소재들을 접하고, 신화 책을 펼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아수라>가 차원 이동의 이야기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의 세계’안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세계가 너무나도 다채롭게 접혀있어서 한 발 한 발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것뿐이다. 대장과 아수라의 여정은 이질적인 주름들을 하나로 연결하며,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이야기였음을 보여준다.
바로크적 상상력의 즐거움
들뢰즈는 이렇게 이질적인 것들이 경계 없이 뒤섞이고, 화려하고 역동적으로 펼쳐지는 세계를 전개하기 위해 바로크(Baroque)적이라는 표현을 빌려왔다. 바로크 예술이 직선보다는 곡선을, 단순함보다 화려함을, 안정감보다 움직임을 중효하게 여겼던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수라>는 단순한 퓨전무협을 넘어선 바로크적인 상상력을 품을 작품으로 읽어낼 수 있다. 이 작품은 무협과 판타지를 더해 만든 콜라주가 아니다. 처음부터 무협과 판타지와 신화가 한 몸이었던 독창적인 주름의 세계다. 물론 이런 파격적인 시도가 모든 독자에게 환영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익숙한 문법을 기대한 이에게는 불친절한 혼돈으로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작품에 대한 평가도 극명하게 나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익숙함과 편안함을 내려놓고 작가가 펼쳐놓은 예측 불허한 주름의 세계로 발을 내디뎌 본다면, 기존의 것과 다른 새로운 세계관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아수라>는 휴재중인 작품이다. 이 칼럼은 현재까지 진행 된 작품을 보고 쓴 칼럼이다. 따라서 추후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평론의 방향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프랑스 현대철학자. 세계를 고정된 실체가 아닌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형되는 흐름으로 이해했다. 철학을 해석이 아닌 사유의 창조 행위로 보았으며, <차이와 반복>, <안티 오이디푸스>(펠릭스 가타리 공저), <천 개의 고원>, <시네마 1: 운동-이미지>, <시네마 2: 시간-이미지> 등을 통해 차이, 되기, 운동의 철학을 전개했다.
필자 안소라 교수
공주대학교 만화예술학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웹툰의 컬러 역할 연구> 로 석사를, <찰스 슐츠의 분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만화영상진흥원 웹툰창작체험관 심화과정 교육 교재 집필 및 조안 한국어 교재 삽화, 웅직백제역사관 일러스트 , 한중일 문화교류 일러스트 등을 제작하였다. 공주대학교, 배재대학교, 한국 영상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현재 대덕대학교 K-웹툰과에서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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