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컷의 물음 07] 만화에서 만나는 동서양 인문학
현실을 닮은 꿈, 꿈을 닮은 현실
작품 : <후궁공략> ∣
철학 : 장자의 호접지몽 胡蝶之夢과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대덕대학교 안소라 교수
학생들과 수업하다 우연히 보게 된 작품이 있다. 카카오페이지에서 연재된 봉봉 작가의 <후궁공략>이다. 처음에는 흔한 게임 빙의물처럼 보였다. 하지만 6화에 등장하는 한 문장이 이 작품을 다르게 보이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호기심이 일었다. 작가는 왜 ‘정상’이러는 단어에 굳이 따옴표를 붙였을까. 이 장면 직전의 이야기는 이렇다. 고3인 주인공 요나는 자신이 어릴 적 즐겨하던 <후궁공략>이라는 게임 속으로 들어가 황귀비의 몸으로 빙의된다. 자신이 게임 속 캐릭터에 들어왔다는 사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던 요나에게 첫 번째 퀘스트 상태창이 뜬다. 요나는 로그아웃을 하려고 했지만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상한 공간이 만들어져 요나에게 게임을 클리어하라고 종용한다. 그 공간에서 도망치려고 하는 요나를 게임마스터가 쫒는 찰나, 시공간의 벽은 깨지고 다시 원래의 게임 자리로 되돌아온다. 그때 요나의 내레이션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였다. 하지만 요나는 지금 게임 속에 들어와 있다. 결코 정상일 수 없다. 작가는 이 내레이션을 통해 요나 스스로가 게임 속 가상세계로 들어온 것을 잊고 있다는, 혹은 요나가 속한 게임 속 가상세계와 현실세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후궁공략>의 세계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법칙으로 움직인다. 호감도, 보상, 페널티가 감정의 기준이 되고 사랑은 선택지들의 결과로 계산된다. 표정 하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까지 모두 시스템의 판단 아래 점수화 된다. 가상세계 속 감정은 마음의 흐름이 아니라 데이터로 존재하는 것이다. 감정은 숫자가 되고, 윤리는 알고리즘이 된다. 이는 프랑스의 철학자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복제가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작동한다는 역설의 구현이다. <후궁공략> 속의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은 프로그램이 만든 가짜지만, 그 감정은 오히려 더 진짜처럼 느껴진다. 인물들의 사랑과 고통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하이퍼-리얼한 감정으로 바뀐다.
![게임 속 인물인 황귀비가 된 이요나 [카카오페이지 갈무리]](https://i0.wp.com/livingsblog.com/wp-content/uploads/2025/10/1440_2997_1540.png?w=900)
장자와 보드리야르
앞선 칼럼 1회에서 장자와 들뢰즈를 통해 존재의 변화와 감정의 생성을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이번 글은 장자와 보드리야르를 나란히 세워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묻고자 한다. 실제 독자평에서도 장자의 호접몽과 가상현실이 언급된 만큼 <후궁공략>은 두 철학을 자연스럽게 겹쳐놓은 작품이다. 장자는 만물이 서로 변하며 경계를 잃는 사유를, 보드리야르는 복제와 기호가 실재를 대체하는 철학을 말한다. 하나는 꿈을 통해 실재의 경계를 흔들고, 다른 하나는 복제를 통해 실재의 자리를 지워버린다. <후궁공략>은 바로 그 두 지점,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무너지는 자리에서 서사를 시작한다.
현실을 닮은 꿈, 꿈을 닮은 현실
<후궁공략>의 구조는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장자의 호접지몽을 떠올리게 한다. 앞서 언급했던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라는 내레이션은 요나가 현실의 인간인지, 게임 속 존재인지 구분할 수 없게 만든다. 그녀는 플레이어이면서 동시에 NPC로 기능한다. 꿈과 현실, 인간과 데이터의 경계가 뒤섞인다. 보드리야르의 언어로 보자면, <후궁공략>은 시뮬라시옹의 완성된 형태이다. 원본은 사라지고 복제만이 남은 세계, 실재보다 복제가 더 진짜처럼 작동하는 곳. 게임 속 요나의 감정은 가짜지만, 그 가짜가 진짜보다 더 현실적으로 작동한다. 결말부의 햇살의 대사는 이를 상징적으로 압축한다.
“꼭 깨어나야 하나요? 어쩌면 당신이 있던 곳이 꿈이고 이곳이 현실.
당신은 이요나가 된 꿈을 꾸다가 ‘깨어나서’
이곳에서 눈을 뜬 것일지도 모르는걸요?
출처 : 네이버 블로그 모카커피 마시기 https://m.blog.naver.com/only1pink/222851675867
![햇살. [카카오페이지 갈무리]](https://i0.wp.com/livingsblog.com/wp-content/uploads/2025/10/1440_2998_1639.png?w=900)
이 대사는 장자가 말한 꿈의 뒤바뀜과 보드리야르의 복제의 전도를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후궁공략>의 세계에서 현실은 더 이상 하나가 아니다. 요나가 깨어나려는 곳은 현실일까, 혹은 또 다른 시뮬레이션일까.
정상이라는 말의 그림자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는 요나의 말은 이상하다. 그녀는 현실로 돌아가지 못했는데 무엇이 어떻게 ‘정상’일 수 있겠는가. 이 문장은 요나의 언어가 아니라, 시스템의 언어이다. <후궁공략>의 세계에서 ‘정상’은 인간의 평온이 아니라 프로그램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이다. 요나의 불안은 오류로, 저항은 버그로 처리된다. 시스템은 그녀를 다시 통제가능한 자리로 되돌린다. 따옴표는 이 모순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요나가 스스로 말하지만, 그 말의 주체는 더 이상 요나가 아니다. ‘정상’은 그녀가 빌린 시스템의 언어이며, 그 순간 요나는 인간이 아니라 시스템이 말하게 만든 캐릭터가 된다. 그래서 이 ‘정상’은 회복이 아니라 복귀이다. 자유로의 복귀가 아닌 통제 속으로의 복귀. 요나의 세계는 이제 완전히 작동하는 시스템, 즉 비정상이 정상화된 세계가 된다.
<후궁공략>은 로맨스판타지 장르이지만 그 이면에는 심도 있는 철학이 깔려 있는 웹툰이다. 감정이 수치로 환원되는 가상세계 속에서도 요나는 여전히 사랑하고, 고통 받고, 선택한다. <후궁공략>은 우리 세계에서 정상은 누구의 언어인가라고 묻고 있다. 우리가 무심히 받아들이는 현실의 기준, 그 정상이라는 질서가 어쩌면 이미 누군가의 코드 속에 쓰인 명령어일지도 모른다.
장자
장자(莊子, 기원전 369년경~기원전 286년경)는 고대 중국 전국시대의 철학자로, 노자(老子)와 함께 도가(道家) 사상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인위적인 제도나 가치 판단에서 벗어나 자연의 순리 그대로 살아가는 삶을 강조했다. 세상 만물이 도(道)의 관점에서 모두 평등하다고 바라 본 만물제동(萬物齊同),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며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믿는 인식이 얼마나 상대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호접지몽(胡蝶之夢),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누리며 노니는 삶의 태도를 의미하는 소요유(逍遙遊) 등으로 유명하다.
장 보드리야르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로, 현대 소비 사회와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실재’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날카롭게 분석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그의 이론은 철학뿐만 아니라 미디어 이론, 사회학, 예술비평 등 다양한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원본보다 더 진짜로 인식되는 복제물 시뮬라크르(Simulacres)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작용이나 상태를 말하는 시뮬라시옹(Simulation)을 통해 실재와 가상의 구분이 모호한 세계에 대해 역설했다.
필자 안소라 교수
공주대학교 만화예술학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웹툰의 컬러 역할 연구> 로 석사를, <찰스 슐츠의 분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만화영상진흥원 웹툰창작체험관 심화과정 교육 교재 집필 및 조안 한국어 교재 삽화, 웅직백제역사관 일러스트 , 한중일 문화교류 일러스트 등을 제작하였다. 공주대학교, 배재대학교, 한국 영상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현재 대덕대학교 K-웹툰과에서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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