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은 전시, 참 아름다운 고통 – ‘만화, 숭고한 삶의 여정’ 


‘만화, 숭고한 삶의 여정’ 

<낙원 PARDISE> 박건웅 작가 

<많이 좋아졌네요> 우영 작가 

<그레그 이야기 : 눈물의 출처> 박주현 작가 

 




한국만화박물관 1층에서는 ‘우리나비’ 출판사에서 준비한 ‘만화, 숭고한 삶의 여정’ 기획전이 29일까지 전시되고 있다. 


만화박물관을 들어서면 바로 앞에 ‘이웃의 온도’ 전 입구가 보이고,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넓은 공간과 상영관이 보이는데, 그 옆 벽을 따라 매번 독특한 전시가 이루어진다. 반듯하고 시원한 공간도 아니고, 작고, 꺾이는 곳이라 공간과 잘 어우러지지 않으면 전시를 편안하게 즐기기 어려운 곳이기도 하다. 


박건웅 작가의 '낙원 PARADISE' 전시.
박건웅 작가의 ‘낙원 PARADISE’ 전시.


하지만 이번 전시는 만화 속 장면을 입체적으로 구성하여 관람객이 작품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듯하다. 작고 불규칙한 공간임에도 스토리 체험형 전시 및 소품을 깨알같이 넣어두면서 더욱 재미있고도 감각적이며 지루하지 않는 전시로 꾸며낸 것이다. 


박건웅 작가의 '낙원 PARADISE' 전시.
박건웅 작가의 ‘낙원 PARADISE’ 전시.


의도된 관람은 아니었다. 만화도서관을 가던 중, 최근 ‘세월 1994~2014’으로 BIB 황금사과상을 수상한 박건웅 작가의 이름과 묘하게 시선을 잡아 끄는 강렬한 흑백의 만화가 눈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나가던 이의 시선과 관심을 잡아 끌 정도로 강렬한 흑백의 만화와 너무도 아름다워서 더욱 슬픈 그림은 독특한 구성과 전시로 한동안 그곳에 머물게 만들었다. 


색다른 체험을 제공하는 박건웅 작가의 '낙원 PARADISE' 전시.
색다른 체험을 제공하는 박건웅 작가의 ‘낙원 PARADISE’ 전시.


전시를 기획한 아이나비 출판사는 “이번 전시를 통해 만화가 인간의 삶과 감정을 탐구하는 예술임을 관객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고 기획의도에 밝혀놓았다. 만화가 가지는 해학이 이렇게 진지하게 발휘될 수 있음을, 이렇게 아름답고 섬세하게 그릴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박건웅 작가의 <낙원 PARDISE>, 우영 작가의 <많이 좋아졌네요>, 박주현 작가의 <그레그 이야기 : 눈물의 출처>라는 순서로 이어지는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주제가 바로 ‘보호자’의 자리와 시간이라는 점이었다. 


우리는 ‘보호자’라는 존재를 언제 자각하게 될까? 어릴 때는 엄마의 손도 놓지 못하다가, 모른 척 지내다가 힘겨움 속에 가장 먼저 떠올리기도 하지만, 더불어 떠난 이들을 그리거나 내가 성장한 후에도 가장 진하게 느낄 수 있는 감정, 그것을 단어로 말한다면 ‘보호자’일 듯하다. 


이번 전시에 올린 작품은 오래 전 떠난 아이들의 기억, 상실과 재해 그리고 슬픔과 아픔의 감정에서 더욱 절실하게 느끼는 자신과 ‘보호자’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주고 있었다. 


어쩌면 출판사에서 의도한 ‘만화가 문학과 미술, 철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깊은 감동을 줄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는 의도가 적절히 전달되고 있음이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바로 뒤편에서 전시되고 있는 <이웃의 온도> 전시와 그 맥을 같이하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의미를 구성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박건웅 작가의 '낙원 PARADISE' 전시.
박건웅 작가의 ‘낙원 PARADISE’ 전시.


먼저 박건웅 작가의 <낙원>은 100년의 세월을 건너 잊을 수 없는 기억과 진실을 마주하는 이야기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간절한 바람을 품고, 100년 전 우주에서 실종된 아이들을 찾아 나서는 늙고 병든 부모들의 절박한 여정을 그린 박건웅 작가의 신작 흑백 SF 장편 그래픽노블이다. 


“작품은 개인의 상실감을 넘어 기억과 망각의 의미, 시간의 본질, 포기할 수 없는 부모의 사랑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광대한 우주와 SF적 설정을 배경으로 밀도 있게 펼쳐낸다. 


박건웅 작가는 특유의 선 굵은 흑백 드로잉과 깊이 있는 시선을 통해 역사의 아픔과 인간 존재의 무게를 담아냈다. 거대한 슬픔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인간애와 희망의 메시지는 독자에게 깊은 울림과 묵직한 질문을 남긴다.” _ 작품 소개 중  


박건웅 작가의 '낙원 PARADISE' 전시.
박건웅 작가의 ‘낙원 PARADISE’ 전시.


어떤 의미에서 박건웅 작가의 작품은 이전 작품과 이어지는 우리 사회에서 간직하고 있는 기억의 의미와 함께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와 그 감성에 주목하는 한국적 SF의 맥을 잇고 있는 듯이 보인다. 


깊은 바다 속으로 잠긴 세월호의 기억을 화려한 색과 감성으로 그려낸 작가는, 다시 우주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의미를 흑백의 거칠고 강렬하면서도 단순한 색과 선으로 보여준다. 때론 크고, 작게 이어지고, 구성된 그림들은 특별한 대사가 없어도 그 아픔과 감성이 사무치게 다가온다. 


우영 작가의 '많이 좋아졌네요' 전시.
우영 작가의 ‘많이 좋아졌네요’ 전시.


바로 이어지는 우영 작가의 <많이 좋아졌네요>는 갑작스러운 낙상사고로 의식불명이 된 가장, 가족의 고된 시간과 냉정한 의료 현실을, 작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그려낸 메디컬 드라마로 그려낸 그래픽노블이다. 


2025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한국에서 가장 좋은 책 – 만화 부문’과 ‘한국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으로 선정되었다. 


우영 작가의 '많이 좋아졌네요' 전시.
우영 작가의 ‘많이 좋아졌네요’ 전시.


“이 작품은 ‘보호자’의 시선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는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주인공 기영은 아버지의 사고 소식을 듣는 순간 ‘보호자’라는 역할로 불려 나온다. 종합병원-재활병원-요양병원으로 이어지는 분절된 의료 체계, 외주화된 간병, 요양노동, 그리고 돌봄의 책임이 가족에게 전가되는 현실. 작가는 보호자의 일상과 병원의 서류, 진료비 청구서, 밀려나는 환자들의 풍경을 통해 의료 시스템의 민낯을 기록한다.” _ 작품소개 중  


우영 작가의 '많이 좋아졌네요' 전시.
우영 작가의 ‘많이 좋아졌네요’ 전시.


<많이 좋아졌네요> 전시에는 병원에서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가 “많이 좋아졌네요”라고 한다. 그건 희망이자 응원이지만, 또한 우리가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살아가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게 ‘사고’라는 돌발 상황이 아니라, 초고령사회로 접어든 우리 사회의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라는 게 더욱 무섭게 느껴진다. 벼랑에서 병실을 버티는 그 보호자의 모습처럼. 


박주현 작가의 '그레그 이야기 : 눈물의 출처' 전시.
박주현 작가의 ‘그레그 이야기 : 눈물의 출처’ 전시.


마지막 공간에 준비된 박주현 작가의 <그레그 이야기 : 눈물의 출처>는 우울한 ‘그레그’와 성질 있는 병아리 ‘치코’를 통해 현대인이 겪는 상처와 트라우마를 바라보며, 그 너머의 치유와 재생을 탐구하는 그래픽노블이다. 


귀여운 듯 보이는 캐릭터들이지만, 전시 어디에 있는 ‘그레그’는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시선을 마주보면 영화 <고스트스토리>의 고스트가 떠오른다. 흰 천을 둘러쓴 채 집이 건물로 변화하는 시간 동안 살고, 싸우고, 헤어지고,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고스트는 결국 마지막 쪽지를 펼쳐보고는 사라진다. 그 시간의 아픔과 감정의 파노라마가 그레그의 검은 눈동자에 비춰지는 듯하다.  


박주현 작가의 '그레그 이야기 : 눈물의 출처' 전시.
박주현 작가의 ‘그레그 이야기 : 눈물의 출처’ 전시.


“작가는 ‘우울’과 ‘죽음’을 물과 씨앗이라는 자연의 은유로 바꾸어 보여준다. 이 세계에서 사람들은 죽으면 씨앗이 되어 나무로 자라며, 죽음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 된다. 그레그는 떠난 이들의 씨앗을 수거하고, 남겨진 이들과 이별의 순간을 함께 마주한다. 


씨앗과 나무로 이어지는 순환 구조는 ‘죽음’을 부정이 아닌 변형된 생명으로 바라보게 한다. 


섬세한 그림체와 여백, 말풍선 없는 연출은 텍스트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깊이를 전달한다.” _ 전시소개 중  


박주현 작가의 '그레그 이야기 : 눈물의 출처' 전시.
박주현 작가의 ‘그레그 이야기 : 눈물의 출처’ 전시.


김초엽의 단편집 <행성어 서점>에 ‘시몬을 떠나며’라는 단편이 있다. 그곳 행성에 사는 이들은 모두 외계 바이러스에 잠식되어 가면을 쓰고 있다. 그렇지만 치료법이 발견됐지만, 그들은 가면을 쓰고 있기로 결정했다. 그건 감정에 솔직할 수 있는 여유, 가식에 물들지 않을 자유를 가면이 주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레그의 귀여운 얼굴과 검은 눈동자는 우리의 감정을 쳐다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깊은 마음속에 숨겨진 진실된 감정을 찾아 소통하는 게 필요한 시대임을 말해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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