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컷의 물음 10] 읽히는 예술, 살아남는 형식: 만화의 본질을 묻다 


[한 컷의 물음 10] 만화에서 만나는 동서양 인문학

읽히는 예술, 살아남는 형식: 만화의 본질을 묻다 

대덕대학교 안소라 교수


그동안 우리는 여러 작품과 장면을 통해 만화의 정서와 리듬, 그리고 그 이면의 철학적 구조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사실, 처음 나를 만화에 빠져들게 한 것은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만화라는 형식이 가진 묘한 감각이었다. 분명 텍스트인데 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흑백으로 그려졌는데도 색이 번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칸새의 여백은 항상 나를 끌어들였다. 그 빈 공간에 내가 감정과 시간을 채워 넣는 순간, 만화는 더 이상 읽히는 대상이 아니라 내가 함께 만드는 서사가 되었다. 이 칼럼 시리즈의 마지막 글에서는 그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꺼내 들고자 한다. 왜 만화만이 이런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가. 왜 만화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매체 속에서도 살아남는가. 만화는 어떻게 여전히 ‘읽히는’ 예술로 존재하고 있는가. 이번 글은 만화를 가능하게 하는 형식적 감각, 그리고 그 불멸의 생명력을 묻는 마지막 물음이다.


예술과 미디어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새로운 기술의 등장은 기존 형식의 종말을 예언하는 목소리를 동반했다. 19세기 사진의 발명은 회화의 죽음을 선고하는 듯했고, 1950년대 안방을 파고든 텔레비전의 보급은 영화관의 객석을 비우게 할 것이라는 우려를 샀다. 디지털 혁명은 아날로그가 쌓아 올린 모든 감각적 유산을 0과 1의 신호로 대체하며 지워버릴 기세였다. 


만화 역시 이 거대한 파도 앞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종이 특유의 냄새와 잉크의 질감, 손끝으로 페이지를 넘기는 물리적 감각이 만화의 전부라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만화는 모니터의 픽셀 속으로, 다시 손바닥만 한 스마트 폰의 액정 위로, 이제는 1분 남짓한 숏폼 영상의 문법 속으로 끊임없이 거처를 옮겨왔다. 그때마다 필자는 질문을 갖고는 했다.


‘출판만화책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일까?’ 혹은,  


‘이것을 과연 만화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지만 이런 우려가 무색하게도 만화는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 만화는 그 어느 때 보다도 국경을 넘어 빠르고 광범위하게 확장되는 서사 매체로 진화하고 있다. 어째서일까? 그 해답은 만화가 특정 매체에 귀속된 장르가 아니라, 어떠한 환경에서도 뿌리내릴 수 있는 견고하고 유연한 형식을 지닌 예술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영사기와 스크린이라는 특정 장비를 제거하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만화는 다르다. 만화는 종이 한 장, 거친 벽면, 심지어 냅킨 조각이라도 칸을 나눌 표면만 있다면 어디서든 서사를 시작할 수 있다. 출판만화에서 웹툰의 스크롤과 컷 방식을 지나, 이제 막 태동하는 쇼츠툰과 컷츠(네이버에서 새롭게 제시하고 있는 애니메이션화 된 웹툰)에 이르기까지. 이 변화의 계보는 만화가 기술에 굴복해 온 역사가 아니다. 오히려 만화가 지닌 유연함을 무기 삼아, 위기 속에서 스스로의 형식을 끊임없이 진화시켜 온 생존의 증명이라 할 수 있다.


 


출판만화 : 칸과 공백이 직조하는 능동적 시간


출판만화 시대에 만화의 본질은 종이라는 물체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만화를 진정으로 규정하는 것은 종이가 아니라, 만화기호라고 불리는 정지된 이미지들의 배열과 그 사이에 놓인 침묵, 즉 칸새였다. 만화는 움직이지 않는 이미지를 칸에 가두고 그 칸들을 특정한 순서로 배열함으로써 비로소 시간을 발생시킨다. 이때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그림이 그려진 칸이 아니라 그림이 없는 여백이다. 독자가 첫 번째 칸에서 눈을 떼어 두 번째 칸으로 시선을 옮기는 그 찰나의 순간, 독자의 뇌는 두 장면 사이의 인과관계와 시간의 흐름을 스스로 상상하여 채워 넣는다. 그렇기에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는 단순한 물리적 동작이 아니라, 독자가 작품의 호흡에 개입하는 연출의 일부분이다. 영화가 스크린 위에서 감독이 정한 시간을 흘려보내는 예술이라면, 만화는 독자가 멈추고, 되돌아가고, 건너뛰며 시간을 통제하는 상호작용의 예술인 것이다. 이 정지, 배열, 공백의 언어는 오랫동안 만화의 가장 확실한 DNA였다. 웹툰의 다양한 뷰어 방식 속에서도 이 원칙은 유효했다. 그러나 최근 등장한 쇼츠툰, 컷츠에 이르러 이 경계마저 무너지고 있다. 만화는 이제 정지된 상태에 머물지 않고 기꺼이 영상의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웹툰 : 무너지는 시장에서 피어난 새로운 형식


2000년대 초반, 도서 대여점의 붕괴로 만화 시장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갈 곳 잃은 만화가 찾아낸 피난처는 인터넷과 모바일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만화는 종이의 물성인 ‘페이지’를 버리고, 디지털 인터페이스에 최적화된 두 가지 뷰어 방식을 진화시켰다. 첫째는 세로 스크롤이다. 웹툰의 태동과 함께 시작된 이 뷰어방식은 모니터와 스마트 폰이 제공하는 무한한 길이를 활용한다. 길게 늘어진 여백은 시선을 아래로 당기는 중력이 되고, 독자의 스크롤 속도에 따라 사건은 가속되거나 느려지며 침잠한다. 


둘째는 모바일 SNS 환경에 최적화 된 스와이프(인스타툰과 같은 컷툰)다. 모바일 SNS 환경에 맞춰 화면을 옆으로 넘기는 방식이다. 이것은 흐름보다는 단절에 집중하며, 컷과 컷이 부딪히는 순간의 리듬감으로 서사를 전달한다.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무너진 시장을 떠나 디지털 환경에 뿌리내리기 위해, 만화가 기기의 물리적 특성을 연출의 도구로 흡수했다는 사실이다.


[그림2] 네이버웹툰 '열혈강호' 1화 중.
[그림2] 네이버웹툰 ‘열혈강호’ 1화 중.


 


쇼츠툰과 컷츠 : 영상의 바다, 만화가 지켜야 할 마지막 보루


지금 숏폼 플랫폼에서는 쇼츠툰, 숏툰, 모션툰, 무빙툰 등 다양한 이름의 실험들이 쏟아지고 있다. 네이버에서도 컷츠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뷰어방식의 형식을 제시하고 있다. 아직 명확한 정의도, 표준화된 문법도 없는 이 혼돈의 태동기는 만화에게 중요한 갈림길이다. 만약 만화가 단순히 영상의 화려함만을 쫓아 움직임과 사운드, 더빙에만 의존한다면, 그것은 만화가 아니라 조악한 애니메이션으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이 새로운 영토에서 만화가 살아남기 위한 조건은 역설적이게도 영상 속에서 ‘영상’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만화는 타임라인이라는 강제적인 시간 흐름 위에서도 정지된 칸, 말풍선, 효과음, 문자라는 고유의 기호들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독자가 화면을 멍하니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와 이미지를 교차하며 정보를 능동적으로 읽어내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것이 영상 매체조차 읽을거리로 만들어버리는 만화의 힘이며, 미래의 만화가 숏폼 시대에도 고유한 형식을 잃지 않고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림3] 네이버 컷츠의 '열혈강호' 작가 페이지.
[그림3] 네이버 컷츠의 ‘열혈강호’ 작가 페이지.


형식이 존재하는 한, 만화는 영원하다


출판만화의 페이지에서 웹툰의 스크롤과 스와이프를 지나, 이제 만화는 쇼츠툰이라는 미개척지 앞에 서 있다. 만화의 외형은 시대와 기술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어떤 미래의 기술이 도래하더라도 변하지 않아야 할 단 하나의 본질이 있다. 만화는 여전히 우리에게 읽기를 권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스크린과 영사기가 있어야 존재하지만, 만화는 종이, 모니터, 심지어 동영상 플레이어 속에서도 고유의 기호(형식)만 있다면 어디든 뿌리내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매체가 아니다. 만화가 영상의 문법에 휩쓸리지 않고, 그 안에서조차 ‘읽는 감각’을 이식해 낼 수 있느냐에 만화의 미래가 달려 있다. 인간이 이미지를 기호로 해석하고 이야기를 읽으려 하는 본능을 멈추지 않는 한, 만화는 어떤 낯선 뷰어를 입더라도 불멸의 생명력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필자 안소라 교수

공주대학교 만화예술학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웹툰의 컬러 역할 연구> 로 석사를, <찰스 슐츠의 분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만화영상진흥원 웹툰창작체험관 심화과정 교육 교재 집필 및 조안 한국어 교재 삽화, 웅직백제역사관 일러스트 , 한중일 문화교류 일러스트 등을 제작하였다. 공주대학교, 배재대학교, 한국 영상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현재 대덕대학교 K-웹툰과에서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작권자 © 위클리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실생활에 유용한 정보를 쉽고 정확하게 전하는 생활정보 전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