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고통의 마을 레쉬폰에서 검은 질병의 사도 디레지에와 첫 대면 이후, 약 14년 만에 모험가와 디레지에의 최종 전면전이 펼쳐졌다.
넥슨 던전앤파이터 신규 콘텐츠 ‘디레지에 레이드’는 단순한 스펙 경쟁을 넘어, 디레지에의 비극적인 서사를 완결 짓는 대규모 콘텐츠로 기대를 모았다.
기자는 외부 사이트 기준 220억 블레이드로 약 6시간 동안 트라이 끝에 디레지에를 쓰러트렸다. 퍼스트 서버는 플레이하지 않았고, 선발대 유저들의 공략 영상을 참고했다.
난도는 안개신, 나벨, 이내 황혼전보다 어려웠다. 단순히 기믹이 어렵다기보다 레이드 진행 방식을 숙지하는데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실수하면 민폐가 된다는 생각에 역병 반전도 파티장의 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잘하고 있는건가?”라는 걱정이 드는 경우가 많았다.
클리어 후 성취감이 들었냐고 물어본다면 글쎄, 아무래도 클리어하는 순간까지 공대장과 파티장의 콜에 의존했기 때문에, 보스만 열심히 공격했던 일개 파티원 입장에서는 성취감이 반감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레이드가 재미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특히 디레지에의 고독함과 비극성을 강조한 시네마틱 연출과 도트 그래픽의 한계를 뛰어넘는 비주얼 퀄리티는 긴 트라이 내내 눈을 사로잡았다.
선택과 희생이 만든 디레지에 서사
디레지에 레이드 스토리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선택’이다. 모험가는 힐더의 계획에 휘둘리던 수동적인 칼날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지로 행동하고 결과를 책임지는 능동적인 존재로 성장했다. 예언에 갇힌 꼭두각시가 아닌, 운명의 ‘칼자루를 쥔 주체’가 된 셈이다.
이번 스토리에서는 모험가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에게도 선택의 무게가 주어졌다. 흰 구름 감시자, 죽음의 관조자, 요격대, 달사냥꾼, 안개신 등 여러 인물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지에 스토리의 초점이 맞춰진다.
그 선택의 과정 속에는 숭고한 희생이 뒤따랐다. 블루호크 선장 버디와 1대대 대장 유진, 2대대 대장 단델은 자신을 희생해 셀게이퍼를 막아냈고 요살자 게이론과 철면의 언믹 또한 환요오괴를 막다가 사망했다.
선택을 내리는 주체는 모험가 일행만이 아니다. 재해를 몰고 다니며 주변 모든 것을 역병으로 물들였던 디레지에 역시 자신의 운명에 대한 선택을 고민한다. 최종 결전 직전, 힐더에게 휘둘리는 모험가의 모습에서 동족 혐오를 느끼며, 자신 역시 의지 없이 재해일 뿐인지 깊이 고뇌한다.
모험가는 마지막으로 디레지에에게 “당신은 어떻게 바뀌고 싶었던 거냐”고 질문을 던진다. 결국 디레지에는 자신의 죽음이 힐더의 예언이나 계획이 아닌, ‘자신이 원했던 죽음’임을 밝히며 해방감을 표출한다.
마침내 디레지에는 힐더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한 존재로 변화했다. 이로써 창신세기의 예언은 세 번째로 어긋나게 되었고, 디레지에가 남긴 사도의 힘은 힐더의 손이 닿지 않도록 모험가에게 뒤를 부탁하며 봉인된다.
디레지에가 힐더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스스로 운명을 선택하며 스토리가 마무리된다. 창신세기의 예언이 어긋나는 과정과 사도 디레지에의 비극을 다룬 서사 덕분에, 던파의 서사를 다음 단계로 끌어올리는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
다양한 기믹이 섞인 전투 설계와 역병 반전
디레지에 레이드는 지금까지 선보였던 주요 기믹들을 총망라한 형태다. 기본적인 장판 공격부터 점프, 카운터, 달리기 등 다양한 기믹들이 각 보스마다 복합적으로 등장한다.
그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검은 질병의 디레지에가 상시로 사용하는 ‘바람 패턴’이다. 디레지에는 주기적으로 대사와 함께 바람 방향 패턴을 시전한다. 패턴 자체는 특별히 큰 대미지가 없지만, 바람에 계속 노출되면 질병 스택이 쌓여 좀비로 변한다.
이를 막으려면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는 안전지대로 이동하여 딜과 패턴 파훼를 수행해야 질병 스택이 감소한다. 특정 위치에서 스택을 관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기믹은 디레지에의 ‘걸어 다니는 역병’ 설정을 반영한 것이다. 바람을 타고 역병이 전염되는 것을 기믹으로 표현하여 스토리와 연관성을 높였다.
또한 안개신 레이드의 오행의 기운, 나벨 레이드의 가드처럼 디레지에 레이드에는 ‘역병 반전’이라는 핵심 시스템이 있다. 역병 반전은 안개신의 권능으로 역병 지대를 정화하거나 그로기를 발생시키는 등 다양한 곳에 활용된다. 특히 보스의 붉은 안광과 함께 사용하면 그로기 타임을 열어준다.
역병 반전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레이드의 진행 난이도가 크게 달라지는 핵심 시스템이다. 이외에도 요괴들의 마을 습격 콘셉트에 맞춰 매복 위치에서 대기하면 그로기가 발생하고 각성기를 제외한 스킬 쿨타임이 초기화되는 등 참신한 요소들이 많이 들어갔다.
도트팀은 나가있어
언제나 그렇듯 던파 도트팀이 선보인 퀄리티는 찬사를 보내도 모자랄 정도로 매우 뛰어나다. 베누스 강림, 나벨 레이드, 이내 황혼전을 거치면서 조금씩 기술적으로 발전한 도트 연출의 깊이와 생동감은 디레지에 레이드에서 절정에 달했다. 도트 그래픽의 한계를 매번 스스로 뛰어넘고 있다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중에서도 특히 재앙, 종언, 비명의 사념을 흡수한 디레지에를 처치하면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더러운 피를 흘리는 자’ 연출이 인상적이다. 단순히 화려한 효과를 보여주는 것을 넘어, 이번 스토리에서 디레지에가 가진 ‘존재 자체의 비극성’을 시각적으로 잘 담아냈다.
디레지에는 이번 스토리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재해를 몰고 다니는 존재’로 묘사된다. 그저 존재했을 뿐인데 주변에 피해를 주고 재해를 일으켰으며, 불멸의 몸으로 고통받는 존재다. 이처럼 비극적인 운명을 모험가들이 마주하게 하는 것이 이 레이드의 핵심적인 서사 목표다.
더러운 피를 흘리는 자 연출은 이러한 비극성을 극대화한다. 연출이 시작되면 비가 내리는 장면과 함께 최종 형태로 변신한 디레지에가 빗방울이 떨어지는 하늘을 쓸쓸하게 쳐다보는 모습이 흑백 화면으로 처리된다.
이후 디레지에가 쓸쓸하게 하늘을 보다 몸을 돌려 제자세로 돌아올 때 화면이 컬러로 전환되며 연출이 끝난다. 이는 스토리에서 묘사된 디레지에의 고독함과 비극적인 운명을 잔잔하면서도 강렬하게 전달한다.
이와 더불어 더러운 피를 흘리는 자의 체력이 30%가 되면 등장하는 격돌 연출도 완성도를 자랑한다. 특히 연출 마지막에 흑백 화면에서 컬러 화면으로 전환되며 디레지에의 발톱이 화면을 찢고 나오는 듯한 역동적인 시각 효과는 베누스 강림 연출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했다.
과거로 회귀한 레이드 진행 방식
디레지에 레이드는 서사와 연출이 훌륭했지만, 진행 방식에서 아쉬운 부분이 눈에 띈다. 레이드 방식이 예전으로 회귀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던전앤파이터는 그동안 특정 파티가 핵심 기믹을 전담하는 고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강력한 파티가 주요 보스를 상대하고, 화력이 약한 파티는 레이드 진행에 불리한 효과를 주는 보조 기믹을 전담하는 방식이다. 유저마다 성장 정도가 다르므로 파티 분리는 어쩔 수 없으나, 약한 파티는 레이드 본연의 재미를 온전히 느끼기 어려웠다.
다행히 오즈마나 안개신, 나벨, 이내 황혼전 등 이전 레이드에서 이 문제를 최소화하는 장치들을 마련했다. 특히 나벨과 이내 황혼전은 간섭과 난입 시스템을 도입해, 공간은 분리되어도 여러 파티가 하나의 보스를 함께 공략하도록 구조를 개선했다.
그러나 디레지에 레이드에서는 이러한 난입 시스템이 도입되지 않았다. 레이드는 레드 파티가 디레지에를 연속으로 상대하고, 그린 파티는 역병 지대 관리와 네임드 처치를 도맡는 전통적인 역할 분담으로 돌아갔다.
그린 파티가 담당하는 보조 역할이 흥미롭다면 모르겠으나, 실제로는 역병 반전만 난사하는 등의 단순 반복 조작만 주구장창 사용하게 된다. 이 때문에 그린 파티를 맡은 4명의 유저들은 전투의 긴장감보다 경험의 편차를 크게 느낄 수 밖에 없다.
종민이 형, 파밍 기간이 너무 길어요
디레지에 레이드 보상으로는 ‘디레지에 레거시 무기’와 잠식 방어구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다. 레거시 무기는 과거 던파에서 유행했던 단종 무기를 재해석한 시리즈로, 쿨타임 감소나 오브젝트 대미지 등 기존 세트 옵션과 유사한 형태의 옵션을 지닌다.
무기는 ‘개방률’을 높여 성능을 끌어올리는 방식이다. 물론 기존에 힘들게 태초 레거시를 파밍한 유저들이 디레지에 레거시 무기로 무조건 교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태초 레거시 무기를 사용하던 유저들은 조율 3회를 거친 뒤 ‘검은 질병의 태초 레거시 무기’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 업그레이드 무기는 디레지에 레거시 무기의 개방률 100%와 성능이 동일하도록 설계되어 기존 가치를 지켰다.
언뜻 보면 기존 태초 레거시 무기의 가치를 보존하고, 득템과 성장의 재미까지 챙긴 일석삼조의 보상 시스템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과도하게 긴 파밍 기간이 유저들의 성취감을 떨어뜨린다.
문제는 파밍 기간이다. 디레지에 레이드 클리어 시 주어지는 ‘검은 재앙’ 재료는 4개다. 태초 레거시 무기를 1회 조율하기 위해서는 검은 재앙이 40개가 필요하며, 단순 계산으로만 10주가 걸린다. 총 3회 조율 소교 기간이 30주다.
여기에 3회 조율을 마친 무기를 ‘검은 질병의 태초 레거시 무기’로 최종 업그레이드하려면 추가로 검은 재앙 80개가 요구된다. 이 과정에 또 20주를 소요해야 하는 셈이다. 이 재료를 모두 모으는 데는 기본적으로 50주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중간에 골드 카드 보상으로 추가 획득이 가능하고, 달마다 필요 없는 태초 레거시 무기를 분해하여 검은 재앙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50주보다는 적게 걸리겠지만, 이러한 변수를 감안하더라도 요구되는 재료의 양과 파밍 기간은 너무 길다.
그동안 랜덤성에 의존한 항아리 시스템이 유저들의 질타를 받아 정가 시스템을 도입한 것은 이해가 가지만, 파밍 기간이 너무 길면 무작위 획득이나 다름없다. 과도한 기간은 목표 달성의 재미를 희석시키고, 정가 시스템이 가진 본래의 의미마저 퇴색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