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컷의 물음 – 만화에서 만나는 동서양 인문학 01
같은 장면, 다른 말 – 실패하지 않는 찰리 브라운
작품: 《PEANUTS》 | 철학: 질 들뢰즈, 장자
안소라 교수
‘찰리 브라운’은 공을 차려다 또 넘어진다. ‘스누피’는 지붕 위에서 잠을 자고, ‘루시’는 상담소를 열고, ‘라이너스’는 담요를 꽉 움켜쥐고 있다. 《PEANUTS》를 오래 읽은 독자라면 이 장면들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야구장, 상담소, 학교, 눈 쌓인 거리 위에서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는 익숙하지만, 그 안에서 오가는 말은 언제나 다르다. 같은 장면이 반복되는 듯해도, 《PEANUTS》는 결코 지루하지 않다. 바로 그 ‘다름’ 때문이며, 그 다름은 말에서 비롯된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반복은 결코 같은 것의 복제가 아니며, 차이를 낳는 생성의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반복은 고정된 틀 안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예외와 변주를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운동이다. 《PEANUTS》는 반복의 구조를 따르지만, 항상 다른 말을 통해 다르게 살아 움직인다. 똑같은 실패의 장면, 똑같은 외로움의 패턴이지만, 거기서 나오는 말들은 그때그때 다르다. 한 예로 ‘루시의 상담 부스’가 있다. 1957년 3월 27일 만화에 처음 등장한 루시의 상담 부스에는 찰리 브라운뿐만 아니라 《PEANUTS》에 등장하는 슈뢰더, 셔미, 패티, 바이올렛, 스누피 등이 등장해 여러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개는 자신의 고민상담이다.
![[그림1] 1959년 3월 27일](https://i0.wp.com/livingsblog.com/wp-content/uploads/2025/08/1189_2466_311.png?w=900)
- 심리상담 5센트
- 나는 깊은 우울감을 느껴…
- 어떻게 해야 하지?
- 정신 차려! 5센트 주세요.
하지만 루시는 제대로 된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찰리 브라운이 더 자책하게 만든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루시의 해결책 제시나, 찰리 브라운의 자책이 아니다. 이 상황들의 반복에 있다. 찰리 브라운은 루시에게 속고 자신이 짝사랑하는 소녀에게 고백에 항상 실패한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는다.
그의 좌절은 매번 다른 형태를 띤다. 어떤 날은 분노하고, 어떤 날은 슬퍼하며, 또 어떤 날은 체념한다. 그리고 그 감정은 항상 말로 표현된다. 《PEANUTS》의 핵심은 바로 이 말의 층위에 있다. 감정은 행동이 아니라 말의 뉘앙스와 리듬, 맥락 속에서 드러난다.
장자의 사유에서도 이러한 흐름의 철학이 발견된다. 장자는 모든 존재가 변화하는 흐름 속에 있으며, 고정된 실체나 본질은 없다고 본다. 그가 말한 ‘무위(無爲)’는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만들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흐름 속에 조응하는 태도다. 《PEANUTS》의 인물들은 바로 그런 존재다. 그들은 매번 실수하고, 오해하고, 실패한다. 하지만 그들은 흐름에 자신을 맡긴다. 억지로 교훈을 만들지 않으며, 설명하거나 분석하려 들지 않는다.
들뢰즈의 철학에서 ‘말’은 인물의 본질을 고정하는 장치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주되며 인물을 구성하는 흐름이다. 그는 ‘전개체(dividual)’라는 개념을 통해, 고정된 자아가 아니라 말과 감정, 신체, 리듬의 관계망 속에서 생성되는 주체를 상정한다. 찰리 브라운은 전형적인 캐릭터처럼 보이지만, 그의 말들은 그를 고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매 순간 새롭게 생성되는 인물로 만든다.
![[그림 ] 1957년 9월 4일](https://i0.wp.com/livingsblog.com/wp-content/uploads/2025/08/1189_2467_107.png?w=900)
- ….
- 저 많은 별들을 보고 있으면 자신이 하찮게 느껴지지 않아, 찰리 브라운?
- 아니.
- 난 원래 하찮은 사람이니까 상관없어.
![[그림 3] 1957년 10월 10일](https://i0.wp.com/livingsblog.com/wp-content/uploads/2025/08/1189_2468_1139.png?w=900)
- 우주의 거대함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니, 라이선스?
- 저 별들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몰라 …
- …
- 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걸!
《PEANUTS》의 말들은 철학적인 명제를 직접적으로 담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 말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하나의 철학적 사유의 흐름에 들어서게 된다. 말은 정답이 아니다. 그것은 의미의 표현이며, 질문의 잔향이며, 이해하지 못함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찰리 브라운은 자신이 왜 실패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실패 속에서 말하고, 그 말이 독자의 감정 속에 파문을 남긴다.
장자는 인간 존재를 고정된 자아로 보지 않고, 꿈꾸는 나비처럼 끊임없이 흔들리고 변모하는 존재로 본다. 찰리 브라운은 바로 그런 존재다. 그는 매번 같은 상황에 처하지만, 그 속에서 계속해서 자신을 다시 말하고, 다르게 표현하며, 변화한다. 그는 무너지지 않고, 정지하지 않으며, 멈추지 않는다. 그는 흐름 속에 있다.
《PEANUTS》는 철학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철학처럼 작동한다. 반복되는 장면, 반복되지 않는 말, 그리고 그 말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감정. 이 모든 것이 바로 들뢰즈가 말한 ‘차이와 반복’이고, 장자가 말한 ‘무위의 존재 방식’이다.
찰리 브라운은 실패한다. 그러나 그는 그 실패 속에서 다시 말한다. 그 다름이 바로 《PEANUTS》 를 철학이 되게 한다.
◈ 찰스 슐츠와 《PEANUTS》
찰스 M. 슐츠(Charles M. Schulz, 1922~2000)는 미국을 대표하는 만화가로,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은 신문 연재만화 《PEANUTS》의 창작자다. 1950년 10월 2일, 미국 일간지에 처음 연재를 시작한 《PEANUTS》는 50년간 빠짐없이 매일 연재되며 75개국, 21개 언어로 번역·출판되었다.
《PEANUTS》는 겉보기에는 어린이들의 일상을 그린 단순한 만화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외로움, 불안, 실패, 위로와 같은 깊이 있는 정서가 담겨 있다. 주인공 찰리 브라운은 끊임없이 실패하고 실망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며 독자들에게 오래도록 사랑받았다. 스누피, 루시, 라이너스, 슈뢰더, 샐리 등 다양한 캐릭터들은 각자의 개성과 철학적 메시지를 가지고 만화 안에서 살아 움직인다. 특히 《PEANUTS》는 캐릭터의 행동보다는 짧고도 철학적인 대사로 인물의 내면을 드러내는 방식이 특징이다. 이러한 말의 리듬과 반복, 그리고 그 안의 미묘한 감정의 변화는 단순한 유머를 넘어선 깊은 공감을 하게 만든다.
◈ 질 들뢰즈
질 들뢰즈(1925~1995)는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로, 기존 철학의 체계적이고 고정된 틀을 해체하며 새로운 사유 방식을 제안했다. 그는 전통적인 ‘존재’나 ‘본질’ 개념보다 차이, 반복, 흐름, 생성 같은 개념에 주목하며, 철학을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사고의 장으로 확장시켰다.
대표 저작으로는 <차이와 반복>(1968), <의미의 논리>(1969), 그리고 펠릭스 가타리와의 공저인 <안티 오이디푸스>(1972), 『천 개의 고원』(1980) 등이 있다. 들뢰즈는 칸트, 니체, 베르그송, 스피노자 등 철학사 속 인물들을 새롭게 재해석하며, 철학을 하나의 ‘개념 만들기’의 실천으로 보았다.
◈ 장자(莊子)
장자(BC 369?~286?)는 중국 전국시대의 철학자로, 노자와 함께 도가(道家) 사상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의 사상은 <장자>라는 이름의 책에 담겨 있으며, 삶과 자연, 자아와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전한다. 장자는 인위적인 구분이나 집착을 내려놓고, 흐름과 변화에 몸을 맡기는 자유로운 삶을 강조한다. 그는 현실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마음이 자유로운 상태인 ‘소요유(逍遙遊)’를 이야기하고, 물질적 가치보다 무용지용(無用之用) — 겉보기엔 쓸모없어 보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해를 입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 또한 장자는 ‘호접몽(胡蝶夢)’ 일화처럼,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유연하게 바라보며 존재 자체의 본질을 묻는 사유를 펼쳤다.
필자 – 안소라
공주대학교 만화예술학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웹툰의 컬러 역할 연구>로 석사를, <찰스 슐츠의 《PEANUTS》 분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만화영상진흥원 <웹툰창작체험관-심화과정>교육 교재 집필 및 조안 한국어 교재 삽화, 웅직백제역사관 일러스트, 한중일 문화교류 일러스트 등을 제작하였다. 공주대학교, 배재대학교, 한국 영상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현재 대덕대학교 k-웹툰과에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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